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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양당제를 부술 뻔한 남자
https://youtu.be/QpJy_9EsutQ?si=qEjZ5SuhMNbc9sOd 이 세상의 모든 민주주의 국가 중에서 미국만큼 정치가 극단적으로 양분된 나라는 없어보인다. 1852년 이후 지난 170년간 집권한 모든 미국 대통령은 민주당이나 공화당 소속이었다. 1964년이나 1972년, 1980년처럼 양자구도에서 가장 압도적으로 패한 후보들도 전체 득표의 38%는 받았다. 미국 상하원의 모든 의원들은 민주당이거나 공화당, 혹은 두 당 중 한 당에 사실상 속한다. 이런 사실은 수많은 사람들, 심지어 여러 미국인들조차 미국엔 두 개의 정당 밖에 없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미국의 양당제는 종종 수차례씩, 유의미한 도전을 받아왔다. 가장 최근의 사례는 아마 1992년 대통령 선거일 것이다. 무소속 억만장자 로스 페로가 돌풍을 일으켜 선거판을 뒤흔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큰 자국을 남기고 있다. 1991년 초까지만 해도, 당시 대통령 조지 H. W. 부시는 내년의 선거에서 충분히 재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막 걸프전에서 승전한 참이었고, 지지율은 89%에 달했다. 그러나 그가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었으니, 전쟁이 너무 성공적으로 끝나 사람들이 도리어 잊어버렸다는 것이었다. 대신 그의 임기 초기에 일어난 경기 침체의 기억이 되살아났고, 부시의 인기는 얼마 안가 다시 하락했다. 그리고 바로 이 시점에서 페로가 등장했다. 로스 페로는 1930년 텍사스 동북부의 소도시 텍사캐나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남달랐던 그는 평생 바다는 커녕 배 한 척도 본 적 없었지만, 해군 사관학교에 진학해 6.25 전쟁 당시 해군에서 복역했다. 이후 그는 IBM의 전설적인 영업사원에 등극했고, 퇴사한 후 데이터 처리라는 블루오션에 진출했다. 그가 창업한 ‘일렉트로닉 데이터 시스템’은 GM에게 25억 달러에 매각되었고, 페로는 그 후 1988년에도 새로운 IT 회사 ‘페로 시스템’을 창업해 억만장자 사업가로서 전성기를 누렸다. 한편으로는 1979년 이란 대사관 인질 위기때 용병들을 고용해 자사 직원들을 직접 구출하며 전국적 유명세를 얻었다. 페로는 평소에도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마약을 혐오하던 그는 공화당의 ‘마약과의 전쟁’ 정책에 적극적으로 동참했고, 한편으로는 베트남전 당시 미군 실종자 및 포로들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았으며 수많은 미군 포로들이 아직도 하노이에 수감되었다는 음모론을 믿었다. 그는 1980년대 미국을 이끌던 공화당의 레이건 대통령을 열렬히 지지했지만, 결국 여러 이유로 공화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페로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거의 모르는 사실은 그가 대선에 출마하게 된 계기가 바로 걸프전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의 외교안보 엘리트들이 사담 후세인을 10년간 키워주더니 이제 와서는 그를 몰아내기 위해 수십억 달러를 쓰려고 한다며 미국의 개입을 극렬하게 반대했다. 의회에 전쟁을 반대하라고 촉구하던 페로는 걸프전이 성공적으로 끝났음에도 자신의 입장을 견지했다. 그에겐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했다. 1992년 2월 20일, 페로는 유명 토크쇼 ‘래리 킹 라이브’에 출연해 선거 운동을 시작했다. 이미 1991년부터 4번이나 출연했던 그는 여러 정치적 사안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말하다가 대선 출마 의향이 있냐는 질문을 받았다. 페로는 대담하게도 자신은 절대로 그럴 마음이 없으나, 일반 국민들이 미국 50개 주 전체에서 투표용지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가도록 청원할 경우 출마할 수 밖에 없지 않겠냐고 말했다. ‘국민이 불러낸 페로’ 전략은 대성공을 거뒀다. 로스 페로에게 쏟아진 지지자와 자원봉사자들의 규모는 유례를 찾기 힘들었다. 양당제에 대한 염증과 신선한 인물을 바라는 마음이 겹치면서 하루만에 수천명의 봉사자를 모집한 페로는 50개 주 전역에서 후보 등록에 성공했고, 약속대로 선거 운동을 개시했다. 로스 페로의 1992년 캠페인은 혼합정치적 요소가 강해 이념적으로 분류하기 힘들고, 그나마 중도 포퓰리스트라는 개념이 가장 어울린다. 페로는 동성애자 권리에 대해 개인의 권리라며 진보적인 자세를 취했고, 낙태에도 우호적이었다. 그는 ‘기관총 소유에 반대’하며 총기 규제를 일정 부분 옹호했고, 유류세를 도입해 미래 에너지에 투자하자며 친환경 에너지를 지지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범죄에 강경 대응을 약속했고, 대마초를 비롯한 모든 마약에 단호한 입장을 견지했으며, 이민에 대해서도 미국인들을 해친다며 부정적이었다. 페로가 가장 강조한 분야는 경제 공약이었다. 그는 국가 재정을 가계 살림의 개념처럼 이해했고, 반드시 균형 예산을 달성해야 한다고 믿었다. 페로는 복지 체계를 조정해 지출을 줄이는 한편 부자들을 대상으로 증세해 균형 예산을 확보하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경제 공약의 또다른 핵심은 바로 자유무역과 세계화에 대한 반대였다. 페로는 북미자유무역협정 NAFTA가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앗아가는 ‘남쪽의 거대한 진공청소기 소리’로 돌아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경제적 주권을 중요히 여긴 페로는 타국의 관세만큼 보복 관세를 메기는 상호 관세를 공약했다. 페로의 외교안보관은 재정 균형 아젠다에 걸맞게 비개입주의에 가까웠다. 걸프전을 처음부터 반대한 그는 미국의 군사 개입이 혈세 낭비라고 판단했고, 동맹들에 대한 지원을 줄이고 국방비를 80억 달러나 감액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소련 붕괴 이후 혼란기에 빠진 러시아에 대해서 핵감축과 평화주의를 대가로 지원을 보내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외교 정책이라고 믿었다. 페로는 그 밖에도 기성 정치권에 대한 반감을 이용하는 공약을 여럿 내세웠다. 그는 상하원 의원들에게도 임기를 제한하고, 미국에 만연한 로비를 통제하고, 부패를 척결하는 한편 관료제의 비효율성도 없애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IT 사업가 경력을 이용해서 풀뿌리 전자 민주주의 시스템을 구축해 직접민주주의를 도입하겠다고 주장했다. 이런 페로의 약속들은 그의 신선한 선거운동 방식을 통해서 유권자들에게 전달되었다. 무소속 후보였던 페로는 기존 양당의 인프라적 우위를 극복하기 위해 유권자들과 직접 소통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TV쇼에서 출마를 선언했던 페로는 꾸준히 텔레비전에 출연해 인지도를 높이고 유권자들과 소통했다. 그는 사비를 들여 무려 30분간 자신이 미국의 경제적 상황에 대해 수치와 그래프를 이용해서 설명하는 광고를 제작했다. 당대에도 지루하고 어렵다는 평이 있던, 그리고 숏폼 시대인 오늘날엔 무조건 실패했을, 이 광고는 1650만명의 시청자를 기록해 대히트를 쳤다. 그리고 그들의 지식이 늘어났다고 느낀, ‘똑똑해지는 것’을 좋아한 유권자들은 이 광고가 그의 경쟁자들의 30초짜리 광고에 비해 두 배나 더 진실되었다고 평가했다. 그의 또다른 특징은 호전적이고 예리한 입담이었다. 페로는 키가 167cm에 불과한 단신에 큰 귀와 마른 체구를 보유해서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했으나, 이는 오히려 그의 발언에 힘을 실어줬다. NAFTA가 미국 남부 국경에 ‘일자리를 빨아들이는 거대한 진공청소기 소리’를 만들거라는 그의 경고는 오늘날까지도 쓰이고 있다. 그는 재정적자와 국가부채 문제를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다루고 싶어하지 않는다며 마치 ‘지하실에 갇혀있는 미친 고모’와도 같다고 비유했다. 토론회에서 부시에게 국정 운영 경험이 없다는 지적을 받자 그는 ‘자신에겐 국가 부채를 4조 달러로 늘린 경험이 없다’고 응수하며 강한 한 방을 먹였다. 4월부터 선거전에 뛰어든 페로는 기록적인 돌풍을 일으켰다. 민주당과 공화당 경선에서 양당의 여러 당원들은 그의 이름을 써넣었고, 양당의 전당대회에서 그에 대한 호감도는 30~40%를 웃돌았다. 거대양당은 그를 실존적인 위협으로 바라보며 견제했으나, 한동안 그의 인기는 오히려 더 늘어났다. 1992년 6월 여러 여론조사에서 페로의 지지율은 거의 40%에 육박했는데, 이는 30% 언저리의 부시와 20%대 중반의 민주당 후보 클린턴보다 확연하게 높았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언론이 검증하기 시작한 7월 한 달은 모든 것을 망쳤다. 그의 여러 공약들이 두루뭉술하다는 말이 많았다. 페로가 1980년대 말 부시 가문을 상대로 몰래 정보를 수집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유색인종단체를 대상으로 한 연설에서 그는 흑인들을 ‘당신네 사람들’이라고 부르며 논란을 일으켰다. 캠프 내부의 혼란상 및 참모들과의 갈등이 수면 위에 드러났고, 봉사자들에게 충성 맹세를 강요한다는 폭로가 나왔다. 논란 속에 지지율이 20%대로 하락하자, 페로는 7월 16일 출마 포기를 선언했다. 그는 자신의 공약들이 양당 모두에게 인정받고 있고, 현실적으로 승리 가능성도 희박하며, 또 미국의 선거인단제 특성상 자신 때문에 선거 결과가 1월까지 확정 안 나 혼란이 발생할 수 있기에 사퇴한다고 밝혔다. 페로는 나중에 자신이 사퇴한 이유는 부시가 딸의 결혼식을 방해할 음모(그의 딸이 레즈비언이라는 소문을 유포하려 했단다)를 꾸미고 있었기 때문이라며 부시를 공격하는 음모론을 펼쳤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언론의 포화가 도저히 감당이 안되서였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그는 사퇴하면서도 여전히 재출마의 여지를 남겨놓았다. 페로의 사퇴 이후 선거 형세는 마침 그 발표 당일날 민주당 후보로 확정된 빌 클린턴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컨벤션 효과와 페로에게 가있던 반-부시 표의 결집 덕분에 그는 넉넉히 앞설 수 있었고, 여기에 젊고 유능한 경제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부각시켜 한 때 페로가 가졌던 열기를 흡수했다. 빌은 중도파 유권자들을 포섭하기 위해 상당히 보수적인 노선을 추구했고, 이 역시 그의 인기에 큰 도움이 되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무적으로 보였던 부시는 참패의 위기에 직면했다. 1992년 10월 1일, 페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선거판에 복귀했다. 그의 지지율은 사퇴한 후에도 여전히 10%에 달했고, 그의 복귀 소식에 반등했다. 전후무후한 선거 운동을 벌인 이 억만장자는 무려 텔레비전 방송사들의 특정 시간대를 통째로 구매한 다음 상술한 것과 같은 30~60분짜리 광고를 그대로 실었다. 그는 유례가 없던 3자 토론회에서도 선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10월 말이 되자 그의 지지율은 20%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여전히 클린턴이 승기를 굳힌 상황에서 승리하기에는 부족했다. 1992년 11월 3일 대선 당일날, 그가 승리할 것이라고 기대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페로는 거의 2천만표, 18.91%라는 어마무시한 득표율을 얻었고, 메인과 유타 주에서는 2등을 기록했으며, 여러 카운티들에서 1등을 달성했다. 비록 승리는 못했을지언정 제3당 후보로서는 매우 놀라운 결과였다. 심층 출구조사 결과, 만약 사표 심리가 없었으면 그는 35%의 지지를 받아 당선될 것으로 드러났다. 페로는 분명 모든 주에서 도시보다는 농촌에서 표를 더 많이 받았다. 지지자의 3분의 2는 45세 미만이었던 반면 노인들은 그를 싫어했다. 백인들은 그에게 열광했고 흑인들은 그를 안 좋아했다. 고학력자들은 그에게 회의적이었지만, 제조업 종사자들과 농부들이 그를 가장 많이 뽑아준 집단이었다. 마치 우리나라 제15대 대통령 선거처럼,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결과에서 페로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지금도 의견이 갈리는 주제다. 대선 직후부터 부시가 페로 때문에 패배했다는 주장이 끊이질 않았고, 최근에도 현직 미국 대통령이 이 주장을 반복하기도 했다. 그가 판세에 영향을 별로 안 끼쳤다는 분석이 대체로 우세하다. 적어도 출구조사에 따르면, 페로가 투표장에 안 나왔을 경우 그의 지지자들은 38%가 부시, 38%가 클린턴에게 투표해 정확히 절반씩 갈라졌을 것이었다. 여러 연구에서 그의 존재는 선거의 결과에 큰 영향이 없던 것으로 드러났고, 심지어 페로가 대선 당일 오히려 클린턴의 잠재적 표를 더 잠식했다는 시뮬레이션 연구들도 있다. 반대로 부시가 손해를 봤다는 분석은 페로가 원래 공화당 소속이었고, 클린턴보다는 부시의 정책을 훨씬 비난해 그에게 악영향을 줬으며, 궂은 공격을 대신 해줘 클린턴에게 반사 이익을 안겼다고 결론 내린다. 또한 페로 지지층 중에는 부시의 인기가 더 강했을 농촌 거주자들과 농민, 백인 비중이 높다는 점에 주목한다. 페로가 선전한 거의 모든 카운티는 직전 선거에서 부시가 승리한 곳이었고, 그가 없었으면 부시가 최소한 클린턴이 근소하게 이긴 일부 주는 뒤집었으리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나라에선 대체로 1997년에 이인제가 김대중의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의견이 주류 시각인 반면, 미국에서 이 문제는 영원히 끊이지 않을 논란거리일 것이다. 비록 투표 당일날 결과만 본다면 페로가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결론이 더 타당하지만, 그가 부시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면서 반-부시 감정을 끌어올리는 한편 클린턴을 대신해서 궂은 공격수 역할까지 맡았기 때문에 결국 부시를 패배로 몰고 갔다고 볼 수도 있다. 페로의 정치 인생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후 NAFTA 반대 시위를 주도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냈고, 1995년 자신의 정당 개혁당을 창당해 다시 한번 대선에 출마했다. 그러나 그 4년 사이 선거법이 불리하게 개정되면서 그는 토론에 참여하지 못했고, 4년 전에 비해 부진한 800만표/8.4%를 얻으며 선거를 마쳤다. 그 후 개혁당마저 점차 그의 손을 떠났고, 페로 본인도 2000년 공화당에 재입당한 후 마침내 정계에서 은퇴했다. 페로는 분명 당대 사회 저변에 깔려있던 변화에 대한 갈망을 수집했고, 이를 양당제에 대한 반대와도 엮어내면서 제3후보로는 현대 미국 사상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양당제 시스템을 극복하지 못했고, 그렇게 사라지게 되었다. 로스 페로는 2019년 7월 9일 향년 89세로 사망했다. 공교롭게도 그 당시 대통령은 페로와 유사하다는 말을 듣고, 한 때 개혁당에도 잠시 몸을 담아뒀던 도널드 트럼프였다. 페로에 대한 말년의 평가는 모든 미국인들에게 드리워진 트럼프의 거대한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1992년 클린턴 캠프의 전략을 총괄한 미국의 유명 선거 전략가 제임스 카빌은 2016년 대통령 선거 직전 트럼프가 일자리를 상실한 백인 노동자에게 예수 같은 존재라면, 페로는 세례 요한이나 다름 없었다고 말했다. 트럼프와 페로는 개인적으로 상당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두 인물은 모두 공직 경험이 없던 아웃사이더 출신이었고, 막대한 자산을 가진 성공한 사업가들이었다. 두 인물 모두 재치 있고 호전적이며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언행으로 인기를 끌었다. 두 인물 모두 언론을 공격했고 음모론을 좋아했으며 각자 텔레비전/SNS를 통해서 지지자들과 직접 소통했다. 하지만 둘의 차이점도 많다. 혼합 성향이나 진보에 조금 더 가까웠던 페로와 달리, 트럼프는, 놀랍게도 당시 공화당 평균보단 살짝 진보적이었으나, 보수적 사회문화 가치관을 소유하고 있다. 페로는 대중이 스스로를 똑똑하다고 느끼게 만들었고, 트럼프는 대중에게 자신의 ‘멍청함’에 자부심을 느끼라고 격려했다. 페로는 사실상 자신만이 체제를 보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트럼프는 거의 반체제 인사나 다름없었다. 페로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했고, 트럼프는 사람들의 공포와 절망, 그리고 분노에 집중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트럼프에게선 페로의 향수를 느낄 수 있다. 트럼프와 페로는 기성 정치인과 기득권에 대한 반감을 타고 유명해졌다. 그들은 미국이 외국에 지나치게 많이 개입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이민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유무역이 미국인들의 제조업 일자리를 빼앗아가 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준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들의 핵심 지지자들은 도시보단 농촌에, 사무실보단 조립라인에 더 많이 있었다. 그러니 페로에 투표한 28세의 파릇한 백인 청년 노동자가 멕시코인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기고 트럭 운전사로 전락해 분노한 52세의 중년이 되어 트럼프를 뽑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로스 페로는 당대에 괴짜 취급을 받았고, 그가 그토록 광범위한 인기를 끈 것도 오늘날 보면 신기해보인다. 페로는 미국 3지대라는 한계 속에서 최선의 결과를 달성한 동시에 끝내 50개 주 중 단 한 곳도 이기지 못하면서 그 한계를 드러냈다. 페로 신드롬은 얼핏 보면 그저 1990년대만의 신기한, 단발적이었던 현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진다. 텍사스의 이 억만장자가 애용한 대중매체 전략은 오늘날 유명해지고 싶은 정치인들에게 필수적이다. 그가 그토록 경고한 ‘지하실에 갇혀있는 미친 고모'는 당시 4000억 달러에서 30년 후 2조 달러까지 늘어나며 미국 경제의 뇌관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그가 끝내 입성하지 못했던 건물에서 사는 남자는 페로의 바람대로 군사 개입을 축소하고, 이민자들을 억제하고, NAFTA 뿐만 아니라 자유무역 체제 그 자체를 끝장내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로스 페로는 1990년대에 홀연히 등장한 예언자였다. 세상은 그의 예언을 듣지 않았고, 그의 예언은 세상의 바람과 달리 결국 이루어졌다. 참고자료 90년대 - 척 클로스터만 https://www.politico.com/news/magazine/2019/12/29/ross-perot-the-father-of-trump-089601 https://www.politico.com/news/magazine/2025/07/21/elon-musk-ross-perot-third-party-analysis-00460189 https://www.history.com/articles/ross-perot-populist-1992-election-changed-politics https://www.latimes.com/archives/la-xpm-1992-06-12-mn-236-story.html https://www.ontheissues.org/Ross_Perot_VoteMatch.htm Heeding the Call: An Assessment of Mobilization into H. Ross Perot's 1992 Presidential Campaign- James A. McCann, Ronald B. Rapoport, Walter J. Stone Economics, Issues and the Perot Candidacy: Voter Choice in the 1992 Presidential Election - R. Michael Alvarez, Jonathan Nagler국제 관련 정성글들https://m.dcinside.com/board/newconservativeparty/725231
작성자 : 라파헤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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