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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젤 만셀이 1992시즌을 압도했던 방법
때는 1991년…페라리에서 팀메이트 알랭 프로스트한테 실력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밀려버린 만셀은 F1에서 은퇴하려 했으나 뜻을 바꿔 친정팀인 윌리엄스로 복귀하기로 결정한다.작년인 1990년, 페라리는 맥라렌과 대적할만큼 강력했고, 만셀은 비록 고전했지만 프로스트는 챔피언을 두고 경쟁을 했었다. 반면에 윌리엄스는 컨스트럭터 챔피언쉽 4위에 그치며 라이벌 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고전하고 있었다.윌리엄스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몇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1984년 겨울부터 윌리엄스는 AP 레이싱이 제안한 액티브 서스펜션 시스템을 연구하고 있었다. 1985년 겨울 실버스톤 테스트에서 혼다 엔진을 장착한 FW09와 1987년 브라질 프리시즌 테스트에서 FW11 기반으로 액티브 서스펜션 테스트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거기에 1987년 당시 윌리엄스 드라이버인 넬슨 피케를 중심으로 시즌 도중 액티브 서스펜션 레이스카를 투입하기도 하였고, 실제 몬자에서 피케가 액티브 레이스카로 우승을 거두기도 하였다.하지만 결국 윌리엄스는 1987시즌 도중 액티브 레이스카를 철수시켰고, 더블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는데에는 성공한다. 액티브 서스펜션은 당시 여러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혔는데, 특히 1988년 혼다와 결별한 후 저드 3.5L 엔진을 장착한 FW12는 아예 처음부터 액티브 라이드를 감안하고 개발하였으나 냉각 문제와 바운싱 등 섀시 문제에 직면하였다. 그래서 1998년 윌리엄스는 첫 7경기에서 12번을 리타이어 하는 미친듯한 내구성을 보여줬고, 결국 8라운드 실버스톤에서 윌리엄스는 기존 패시브 서스펜션으로 회귀한 뒤 컨스트럭터 챔피언쉽 7위로 시즌을 마친다.(사진: 1991시즌에 사용한 윌리엄스 FW14)하지만, 1991시즌은 달랐다. 1990년 6월 레이턴 하우스를 떤나 애드리언 뉴이가 윌리엄스에 합류하여 그 즉시 수석 디자이너가 되었고, FW14 개발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동시에 윌리엄스는 ABS(Anti-lock Braking System), 트랙션 컨트롤, 6단 시퀀셜 반자동 변속기까지 개발한다. 그 결과 FW14는 전년도 FW13에 비해 훨씬 빨라졌다.챔피언쉽의 결과는다음과 같이 끝났다. 비록 윌리엄스는 시즌 초 변속기의 문제로 세나가 40포인트를 획득할 동안 나이젤 만셀과 리카르도 파트레세가 각각 6포인트에 그쳤고, 이후 나머지 12경기에서 7승을 가져오며 승승장구하였다. 비록 신뢰도 문제로 챔피언 타이틀은 놓쳤지만, 분명히 강력해졌다.여기서 잠깐, 윌리엄스의 두 드라이버를 주목해보자.1991시즌 만셀은 72포인트, 파트레세는 53포인트였다. 그리고 퀄리파잉 H2H에서는 파트레세 9-7 만셀로 앞섰다. 물론 레이스에서는 만셀이 파트레세보다 강력하긴 했지만, 그래도 둘은 꽤 비슷한 실력을 보여주었다.(사진: 윌리엄스 FW14B)그리고 다음해 윌리엄스는 대부분의 엪붕이들이 알다시피 희대의 사기 레이스카 FW14B를 가져왔다. 흔히, 윌리엄스 FW14B는 최첨단 전기 장치와 여러 보조 시스템 때문에 운전하기 쉬운 레이스카로 알려졌다. 그러면, 당연히 만셀과 파트레세는 꽤 비슷한 성적을 보였을까?아니었다. 만셀은 파트레세 대비 거의 2배에 가까운 포인트를 획득하며 압도했다. 그와 반대로 파트레세는 상대적으로 좋지 않은 레이스카를 탄 슈마허, 세나, 베르거와 비슷한 포인트를 획득하며, 고전했다. 만셀이 신뢰성 문제 등으로 리타이어했던 레이스를 제외하면 9승과 3번의 P2로 엄청난 성과를 보여줬지만, 파트레세는 시즌 단 1승에 그치며 1991시즌보다도 우승 횟수가 적었다. 퀄리파잉에서는 더욱 격차가 심했는데, 윌리엄스가 셋업 문제를 겪었던 캐나다를 제외하고 16경기 중 15번의 폴 포지션을 획득했다. 그 중에 14번의 폴 포지션은 만셀이었고, 파트레세는 단 한 번에 그쳤다.왜 파트레세는 최고의 레이스카를 탔음에도 만셀에게 압도당했으며, 반면에 만셀은 팀메이트까지 이기며 압도했을까? 크게 보면 3가지 이유가 있다.1. 신기술에 잘 적응했고, 잘 맞았다1987년, 당시 윌리엄스에서 만셀의 팀메이트인 피케가 액티브 서스펜션 레이스카를 테스트하던 초기 만셀은 액티브 서스펜션에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만셀은 액티브 서스펜션을 장착한 FW14B가 승리의 열쇠임을 깨닫고, 차를 받아들이려고 했다.1992년 당시 만셀의 레이스 엔지니어 데이비드 브라운은 만셀에 대해 “나이젤은 시즌 초반부터 굶주려 있었다. 겨울 동안 몸을 준비했고, 결코 힘을 늦추지 않았다. 액티브카는 곧바로 빨랐다. 나이젤은 언제나 이점이 있으면 받아들이고 밀어붙였다.”라고 설명했다.또한 만셀은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상당히 공격적인 드라이빙 스타일을 보였는데, 이것이 FW14B의 성향과 잘 맞아떨어졌다.반면에 파트레세는 1977년부터 운전한 베테랑으로, 기존 F1 레이스카에 스타일에 완전히 적응된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완전히 새로운 액티브 레이스카에 그는 부정적이었고, 기존 패시브 서스펜션 레이스카를 더 선호하였기에 적응하지 못하였다.당시 윌리엄스 테크니컬 디렉터 패트릭 헤드는 이에 대해 “시스템이 하중 분포 변화를 교정하는 데는 약간에 지연이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롤 강성과 저항이 사라진 듯한 느낌이었고, 파트레세는 적응하기 힘들어했다. 하지만 나이젤은 교정 후에도 그립이 살아있다는 것을 깨닫고 초기에 떠 있는 듯한 감각을 무시하는 법을 배웠다.”고 설명했다.또한 뉴이 역시 “시스템에 대한 믿음과 기술적 이해를 바탕으로 차량과 조화롭게 운전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하였는데, 만셀은 이를 완벽히 받아들인 반면 파트레세는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원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2. 팀메이트(파트레세)를 체계적으로 무너뜨리기1992년, 만셀은 자신만을 위한 레이스가 아님을 알았다. 강력한 성능의 레이스카를 보유한 현 상황에서 만셀은 가장 강력한 적이 팀메이트 파트레세가 될 것이라는 깨달았고, 팀메이트를 체계적으로 무너뜨리기로 한다. 그래서 당시 대단한 인성으로 유명했던 그는 몇 가지 꾀를 낸다.엪붕이들이 알다시피 지금도 그렇게 그때도 세션 이후 팀의 드라이버들과 엔지니어가 모여 브리핑을 진행한다. 여기서 차의 느낌과 어떤 셋업이 잘 맞는지 피드백을 진행하고, 개발에 활용한다. 근데 만셀은 이 브리핑을 두 번 했다. 왜 그럴까? 만셀은 파트레세에 비해 더 빠른 모습을 보여주었고, 잘 적응했기에 팀 브리핑에서 만셀은 셋업 데이터값을 파트레세와 팀 측에게 공유하기도 했다.중요한건 그게 잘못된 값이었다는 것이다. 맞다. 바로 만셀은 일부러 파트레세를 무너뜨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잘못된 값을 공유한 것이다.그리고 이 거짓 브리핑 후, 만셀은 그의 레이스 엔지니어 데이비드와 단 둘이서 진짜 브리핑을 한 것이다. 또한 만셀은 레이스카의 높이를 조정하는 라이드 하이트 노브 위치가 데이터 레코더에 기록되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 일부러 잘못된 라이드 하이트 셋업을 공유한 후 피트 레인으로 돌아와 몰래 자신의 라이드 하이트값을 변경해버리는 방법 역시 사용했다.물론 당시 FW14B가 엄청나게 강력했기에 이러한 짓을 해도 성능 우위를 점했지만, 캐나다 그랑프리에서는 레이스카의 차고가 지나치게 낮게 설계되어 조종 문제를 겪기도 하였다.3. 힘이게 무슨 소리인가 할 수도 있는데, 그의 힘이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만셀은 180cm가 넘는 키와 80kg에 달하는 체중으로 드라이버들 중 상당한 거구이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근력 등 힘이 매우 강하기로 유명했다. 실제로 1992년을 위해 만셀은 특히 목 근육을 단련하기도 했다.특히 FW14B는 매우 강한 다운포스를 생성해냈고, 뉴이의 레이스카는 특정 상황에서 매우 민감해지기도 했다. 당시 파워 스티어링도 없는 상황에서 만셀의 강력한 힘은 상당한 이점으로 작용했다. 간단히 말해 만셀은 액티브 서스펜션을 믿을 만한 배짱과 ‘차를 붙잡고 씨름할만한 힘’도 있었다는 것이다.실제로 만셀의 힘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몬자에서 패트릭이 만셀에게 “시케인에서 왜 리카르도보다 훨씬 빠른 것인가?”라고 묻자 만셀은 “아주 간단하다. 연석에 접근할 때, 손을 차체 림에 꽉 밀어 넣어버린다. 그러면 스티어링 휠이 튀어 오르는 것을 막고, 훨씬 안정적으로 라인을 유지할 수 있다.”고 답변하였다.그래서 패트릭은 곧장 파트레세에게 만셀의 말을 전하며 똑같이 해볼 것을 지시한다. 파트레세는 그 즉시 이를 실행했지만 단 3랩만에 돌아왔는데, 왜냐하면 힘을 버티지 못하고 장갑 사이로 피가 흘러내릴 정도로 버티지 못하고 손이 다 까져버린 것이다.그렇게 만셀은 1992시즌을 지배하고 첫 번째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였지만, 1992시즌 후반 내년 팀메이트로 만셀의 담당 일진 프로스트가 합류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PTSD를 느껴버린 만셀은 바로 은퇴한 후 미국 인디카 시리즈로 이적한다.그래도 실력만큼은 확실했던 만셀은 인디카 루키 시즌에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고, 포뮬러 원 챔피언 타이틀과 인디카 챔피언 타이틀을 동시에 보유한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그리고 잠깐 윌리엄스와 맥라렌 소속으로 F1에 돌아오긴 했으나 1995년 맥라렌 레이스카가 크게 경쟁력이 없다고 느낀 만셀은 팀을 떠났고, 조던과 계약 가능성도 있었긴 했지만 성사되지는 않고 이대로 만셀의 F1 커리어는 끝이 났다.
작성자 : PREMA고정닉
우리 시대의 전설 커쇼햄을 기억하자
- 관련게시물 : 커쇼 은퇴 한다네커쇼의 정규시즌 마지막 홈 등판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내 급식시절에도 그랬고 많은 사람들이 mlb는 안봐도 1짱이 커쇼라는건 알던 그 선수....커쇼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담아 이 글을 써봅니다...1. 라이브볼 시대 평균자책점(ERA) 역대 1위 커쇼의 통산 성적은 2840.2이닝 era 2.54인데 2.54의 방어율은 라이브볼 시대 선발투수 역대 1위에 해당한다.(1000이닝 이상, 니그로리거 제외)2. 선발투수 era+ 역대 1위 단순 방어율 뿐만 아니라, 리그 득점력과 파크팩터를 감안한 조정평균자책점(era+)은 154로니그로리거를 제외하면 라이브볼 시대 이전까지 포함해도 역대 1위에 올라와 있다.'외계인' 페드로 마르티네즈(2827.1이닝, era+ 154)와도 거의 비슷한 수준이지만 커쇼가 근소 우위를 점하고 있으며, 누적 이닝이 훨씬 적은 제이콥 디그롬(1534.2이닝, era+ 151)이 어쩌면 역전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3. 구종가치 역대 1,2위 커쇼의 포심과 슬라이더의 누적 런밸류는 231.5, 227.1로모든 구종 누적 런밸류중 역대 1,2위에 위치해 있다.(구종별 런밸류는 07년부터 집계)커쇼를 제외하면 오직 벌렌더의 포심(215.8)만이 200을 돌파했다. 스탯캐스트 시대 최고 수준으로 뽑히는 커쇼의 포심 수직 무브먼트.디시 영상 잘 안올라가던데 이게 올라갈 지 모르겠네인코딩 링크 써도 버그 자주 일어나던데 보통 카메라 각도에 좌투 슬라이더 각이 잘 안잡혀서 아쉬운데이런 각도에서 보면 진짜 이뻐보인다. 커쇼를 상징하는 그 구종, 커브4. 투수 mvp 커쇼는 2014년 스탠튼을 밀어내고 투수로서는 드물게 MVP를 차지했다.시간이 지난 지금에야 "타자 중에 줄 사람 없어서 준 거 아님?" 싶을 수 있는데당시 커쇼의 퍼포먼스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었다.커쇼의 2014 시즌 최종 성적은 198.1이닝, 21승-3패에 방어율 1.77을 기록했는데당시 팬들이 느꼈던 커쇼의 퍼포먼스는 그 이상이었다.부상으로 첫 한 달을 날리고, 5월 17일 경기에서 1.2이닝 7실점을 하면서 최악의 스타트를 했음에도 불구하고6월부터 21게임에 나와 무려 163이닝, 18승 1패 방어율 1.38을 기록했다.경기당 평균 등판 이닝은 7.8이닝을 던졌으며,패전은 단 한게임, 노디시전은 단 두 게임이었고 그 두 게임조차 전부 다저스의 승리였다.특히 6/7월에는 11게임 11승, 86이닝, ERA 0.94에 104탈삼진, 8볼넷에 노히트 노런 1회라는불멸의 기록을 작성했다.이걸 라이브로 본 팬들은 어떤 느낌이었을까.5. 사이영 3회 사실 사이영 3회도 대단한 기록이지만커쇼는 더 많은 사이영 상을 따냈을 지도 모른다.2012년은 너클볼러 RA 디키에게 밀려 2위에 그쳤지만지금 기준으로 심사했다면, 혹은 디키에게 인생 뒤집기 너클볼 스토리가 없었다면 수상자는 커쇼가 되었을 것이다.2015년에는 233.2이닝, ERA 2.18에 랜디 존슨 이후 끊겼던 301탈삼진이라는 금자탑을 쌓고대부분의 세부지표에서 1위를 기록했으나하필 아리에타와 그레인키가 1점대를 기록하며 사이영상 3위에 그쳤고,2016년에도 절정의 폼을 보여줬으나(ERA 1.69)아쉽게도 부상으로 결장하면서 (21게임 149이닝) 사이영 상과 연이 없었고2017년에도 ERA1위를 기록했으나(2.31, ERA+ 179)부상이 발목을 잡으면서(27게임 175이닝) 아쉽게 슈어져에 이은 사이영 2위에 그치고 만다. 부상이 많았던 것은 정규시즌 내내 200 하고도 몇십 이닝을 더 던지고, 포스트 시즌에서도 3일 휴식 후 7회에도 부르는 등 다저스가 커쇼에게 혹사에 가까운 의존도를 보였기 때문이었다.이처럼 커쇼는 MLB의 역사에 이름을 새긴 위대한 투수다.커쇼가 주춤할 때 벌렌더가 휴스턴에서 수많은 업적을 세웠음에도여전히 대다수의 팬들은 커벌슈그 논쟁에서 커쇼가 우위로 평가하곤 한다.나에게는 오랫동안 위대한 투수로 기억될 것이고,한국에선 오랫동안 "류현진 전 동료"로 기억될 것이며,김성모에게는 방심을 자주하는 투수로 기억될 것이고,어떤 이에게는 포시 때마다 웃음을 가져다 준 웃음벨로 기억될 것이며,어떤 이에게는 봉사를 좋아하고 신앙심이 투철한 좋은 이웃으로 기억될 것이고,어떤 이에게는 자상한 아버지이자 사랑스러운 남편일 것이다. 이제 그런 커쇼의 MLB 커리어는 공식적으로 마무리 되어간다.몇 년 전부터 은퇴 생각이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던 그가, 드디어 마운드를 떠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고 한다.앞으로 느껴질 그의 빈자리가 조금이나마 작게 느껴질 수 있도록남은 등판 속에서커쇼가 더 아름다운 마무리를 보여줄 수 있기를강렬히 소망하는 마음이다.
작성자 : ㅇㅇ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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