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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업계의 창과 방패 (크랙방지 vs 크래커)
1. 창vs방패, 그 시작게임시장에서는 늘 창과 방패의 싸움이 있었다.게임을 불법복제하려는 크래커들과 이를 막으려는 게임사들의 싸움이 바로 그것이다.게임업계의 이 기나긴 싸움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고인돌 시리즈를 할 때부터 이미 불법복제와의 싸움은 있었다고 볼 수 있다.공짜를 향한 인간의 욕망은 언제나 같았나 보다.당시에는 인터넷이 아닌 저장용 매체 (5.25인치 3.5인치 플로피디스켓 FDD, CD 등) 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당시 인터넷이 오늘날처럼 보급화되지 않았고 통신비가 너무 비쌌기 때문에 저장용 매체에 담겨져 판매되었다. 하지만 통신비가 저렴했어도 3MB 정도 용량의 게임을 다운로드 받으려면 밥먹고 똥싸고 밖에 나가 친구들과 말뚝박기를 하고 들어와야 겨우 다운로드가 완료될 정도의 속도이다보니 통신으로 다운로드 받는다는건 사실상 무의미 했다.FDD의 뒤를 이어 CD가 차세대 저장매체로 등장했다.지금은 CD가 사라지고 있고 심지어는 PC를 조립할 때 CD-Rom등은 빼고 견적을 맞추는 등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추세에 있지만, 처음 출시되었을 당시에는 굉장한 저장매체였다. 그 당시 하드 용량이 끽해야 20MB 내외였고, 그나마도 하드디스크가 없는 컴퓨터도 많았다. 그런데 CD는 650MB 였으니 얼마나 획기적인 저장매체였는지 짐작이 간다. XT, AT 시절의 하드 용량은 40MB ~ 100MB정도였다.이 CD의 약점이자 장점의 역할을 한 것이, CD는 한 번 쓰면 수정이 불가능하다는 거였다.CD-writer가 존재하기는 했지만, 가격이 진짜 너무너무 비싸서, 개인들은 CD를 복제한다는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고, 또 복제시장을 담당하던 어둠의 세계에서도 CD를 불법복제에 사용할 만큼 자본이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CD를 저장매체로 선택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복제방지 역할이 되었기에 게임업계는 CD로 출시하는 게임에 그 어떠한 프로텍션도 걸지 않았었는데, 대만에서 최초로 작정하고 CD를 불법으로 찍어내기 시작하자 엄청난 타격을 맞고 무너져내린다.컴퓨터라는 것이 보급화되지도 않았고, 또 잘 다루는 이는 손에 꼽았기 때문에 게임 불법복제는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다.동네 컴퓨터 가게에서 개눈탱이 쳐맞고 사는 것이 일상이었던 시절 불법복제판으로 깔아주는 스타크래프트 하나에 신나던 시절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싸움은 그저 잔잔한 투닥거림에 불과했다.그런데 인터넷이 점점 보급화되고, 통신비 또한 자유경쟁 하에 앞다퉈 내려가면서 이 싸움은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한다.바로 당나귀(eDonkey)의 등장 되시겠다.P2P라는 것이 등장하자, 수많은 자료들이 업로드되었고, 복잡한 복제과정을 모두 생략한 채 클릭 몇 번으로 원하는 자료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저작권이라는 개념이 모호하던 시절, 수많은 컨텐츠들이 아무런 범죄의식 없이 무차별적으로 복제, 공유되었고 가장 먼저 타격을 입은 업계는 음원업계였다.이어 영화, 게임 등등도 같은 수순을 밟게 된다.이때부터 본격적인 창vs방패의 싸움이 시작된다.2. 방패는 언젠가는 깨부숴진다스팀같은 게임 플랫폼이 등장하기 전 게임이란 CD를 사서, 설치를 하고, 이용하는 방식이었다.(소위 말하는 패키지게임)어쨌든 CD와 같은 '물리적' 데이터베이스가 있어야 했다.CD 출시 초창기에 CD가 불법으로 복제하기 힘든 환경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다가 똥을 뒤집어 쓴 게임업계는 대책을 강구하여 게임을 출시하게 된다. 이 당시에는 개별적인 락 회사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있었어도 이용하는 클라이언트가 없었기에 있으나 마나한 존재) 게임 개발사 나름대로의 복제방지 대책을 강구하였는데 이것을 DRM, 저작권 보호 장치라고 한다.이들은 CD가 없으면 구동이 안되는 방식을 통해 강제로 '물리적 데이터베이스 보유' 요건을 충족시켜야만 게임 구동이 가능하도록 했지만, 크래커들은 noCD 크랙 등을 통해 이를 무력화시켰다. 놀란 게임업계는 CD에 라이센스 코드를 동봉하여 이 코드를 인증받아야만 이용이 가능하도록 하였으나, 크래커들은 이 라이센스 코드의 암호화를 복호화하여 이러한 코드를 무한생성하여 사용가능하도록 하여 배포하였다.이른바 CD-KEY 생성기였다.게임업계는 더미파일 (쓰레기 가짜 파일) 을 잔뜩 늘여놓는 방법 또한 고안하였으나, 크래커들은 아랑곳하지않고 더미파일까지 통째로 크래킹해버리는 방법으로 게임출시 이후 단 몇시간만에 크랙판을 배포하였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게임업계는 더미파일까지 복제를 하게 되면 게임에 치명적인 에러를 발생시키는 방법을 고안하였으나, 크래커들은 에러의 패턴까지 복사해서 이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으로 또 방패를 깨부숴버렸다.이렇듯 창과 방패의 싸움에서 늘 공격자는 방법을 찾아냈고, 방패는 매번 패배했다.유명한 크래커 그룹들은 신작 게임이 출시되면 짧으면 몇시간, 길면 몇주만에 크래킹에 성공해 배포하곤 했다. 게임 개발사 입장에서는 수십~수백억을 들여 오랜 시간과 수많은 인력을 동원해 개발한 게임이 단 몇 주만에 풀려버려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인 것이다. 이제 좀 팔아보려는데 불법 복제판이 인터넷을 떠돌았고, 이용자들은 굳이 비싼 돈을 주고 정품을 사는 것보다 불법 복제판을 다운받아 이용하였다.또한 정품 CD를 갖고있는 사람들도 CD-Rom의 불안정성으로 게임이 갑자기 멈추거나, 드드득 하는 소음에 민감한 이들은 불법복제판을 다운받아 사용할 정도가 되었다. (데몬툴즈가 국민 가상 드라이브가 된 것처럼)게이머들에게 매우 익숙한 아이콘이쯤 되자 게임업계에서는 크래커들을 이길 방법이 없다고 판단해서 한 발 양보를 하게 되는데, DRM을 게임 복제를 원천봉쇄시키는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를 늦추는 방법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한 마디로 니네가 방패를 부수려고 고군분투 하는 동안, 우리는 얼리어답터들에게 게임을 팔겠다! 라는 것.이때부터 v1을 공개하며 게임을 팔고, 크래커들이 v1을 다 뚫었을 즈음에 업데이트된 v1.1에 새로운 프로텍션을 적용하여 패치판을 내놓는 식.어찌보면 DLC의 등장은 당연히 예정되어 있는 수순이었을 지도 모른다.이는 실제로 어느정도 효과를 보았는데, 크래킹에 '언제 뚫리냐' 가 매출에 엄청난 영향을 주던 시기에 작정하고 시간만 벌려는 스탠스는 매우 현명했다. '완전판' 이라고 불리는 최종패치버젼까지 배포가 되었을 시점에는 많은 구매자가 있었기 때문에 게임업계는 출혈을 최대한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게임업계는 광고에 목숨을 걸게 되었고, 고퀄의 시네마틱 영상들의 필요성이 부각되게 되었다.CD를 복제하던 시절 가장 강력하게 크래커들에게 대항했던 DRM은 스타포스 락이라는 DRM을 선보였다. 스타포스 락은 작정하고 좆같이 만들어서 크래커들의 멘탈을 흔들어 놓았는데, 진짜 얼마나 좆같게 만들어 놓았는지 며칠만에 크래킹하던 이들이 실제로 몇개월이 걸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어쨌든 여지없이 깨지긴 깨짐)게임 업계 입장에서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다! 라고 생각해 쾌재를 불렀는데, 이는 얼마 못 가 비난의 화살로 돌아오게 된다.스타포스 락은 얼마나 좆같게 꼬아놨는지, 개발자들도 이 락을 완벽히 알지 못했는데 이 락은 정품 이용자를 구분하지 못하고 불법 이용자로 판단해 정상적인 구동을 막아버리거나, 갑자기 컴퓨터를 셧다운 시키는 등의 버그를 발생시켰고 스타포스 락 제작사에서 이러한 버그를 막기 위해 내놓은 패치마저 제대로 설치가 되지 않는 사태가 발생하였다.그러니까 내가 자물쇠를 만들었는데 내가 못 여는 사태가 되어버린 것이다.또한 스타포스 락이 적용된 게임을 지우면 스타포스 드라이버까지 따로 지워야하는 번거로움을 유발했다.정품 사용자조차 시발 소리를 내게 만드는 이 락은, 크래커나 정품 사용자 모두에게 최악의 락으로 회자되었고 당연하게도 이 락은 사장되었다.크래커가 뚫기 어려울 수록 개발자 입장에서도 어렵고, 이는 정품 사용자들에게 불편함을 야기시켰다.게임 개발사 입장에서는 이러한 복잡한 락을 안 걸자니 크래커들이 금방 불법복제판을 풀어놓을 것이고 락을 걸자니 갖은 오류로 인해 정품 사용자들에게 욕을 들어먹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하드웨어가 발달함에 따라 크래커들이 게임을 뚫는 시간이 점점 단축되고, 불법 복제판의 접근성은 높아지고, 인터넷 속도는 빨라짐에 따라 '어차피 곧 풀리겠지' 하는 마음으로 구매를 하지 않고, 판매량은 점점 줄어들어갔고, 불법 복제판이 나오면 다운받는 사람들은 나날이 늘어만 가는 상황.블리자드처럼 자체 플랫폼을 생성하여 온라인으로 구동방식을 돌리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는 천문학적인 플랫폼 설계, 설립, 유지보수 관리비용을 생각하면 불가능에 가까운 암울한 상황이었다.(심지어 이것도 뚫어버림ㅋㅋㅋㅋ)근 몇년동안 그렇게 시발시발 소리하며 게임 업계가 피똥을 뒤집어쓰며 불법 복제때문에 쪽박을 차고 있던 중, 사상 최강의 방패가 등장한다.3. 응 그런데 우리는 안깨지는 방패야이 방패의 이름은 데누보 락, (Denuvo) 엄청난 방어도를 자랑하는 방패이다.엄밀히 말하면 저작권 보호 장치는 아니고, 이 저작권 보호 장치를 보호해주는 방패인 셈인데, 즉 DRM이 프로그램을 암호화해서 불법복제를 방어하는데, 이 DRM을 데누보가 암호화시켜 보호해버리는 것.게임 내 퍼포먼스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으면서, 불법 복제는 막아주는 새로운 방식이었다.자세한 구동 방식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이들은 소스에 더미파일을 숨겨놓거나 가짜 복호화 키를 숨겨놓는 등의 새로운 방식의 락을 도입했다. 심지어 이 극악무도한 데누보는 더미파일까지 암호화를 시켜버려서 이 암호를 풀기 전에는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조차 모르게 만들어놓아버린 것이다.비유하자면, 1TB 하드에서 특정한 파일을 찾아야하는데, 랜섬웨어에 걸려서 파일명이 죄다 알 수 없게 암호화 되어버렸다. 이를 복호화해서 풀어야 하는데, 데누보라는 랜섬웨어가 랜섬웨어가 걸린 당신의 PC를 또 암호화시켜버린 것이다. 크래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개 씨발인 상황이다.이 데누보 락이 처음으로 적용된 게임은 피파15 였는데, 유명한 중국 크래커 그룹인 3DM이 3개월만에 크래킹에 성공한다. 그리고 코멘트를 남기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니네 씨X 아주 좆같이 만들어 놨던데, 그래도 우린 2주만에 뚫었어^^" 이었다.3DM 그룹의 리더, 버드 시스터작업에 착수한지 2주만에 뚫었다는 말인데 (허세인지 진짜인지는 모름) 결국 헛수고하지 마라, 방패는 언젠가는 부숴진다는 뜻이었다.데누보도 스타포스 처럼 한 세대를 지나가는 방패에 불과하다고 치부되던 찰나, 데누보가 대망의 데누보 v3 를 내놓는다.데누보 v3는 피파16에 처음으로 적용되었는데, 크래커들은 말 그대로 패닉상태에 빠진다.마찬가지로 3DM에서 자신만만하게 크랙판을 배포했는데, (이마저도 5개월이 걸림) 사용자들이 온갖 버그를 제보했다.실행파일 자체는 뚫리더라도, 수많은 더미파일 (가짜 쓰레기)이 같이 구동을 해서 게임이 꺼지거나, AI들이 제대로 작동을 안하거나, 그래픽이 깨지거나 하는 등의 비정상적인 작동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도저히 게임 진행이 불가능한 수준이어서, 3DM은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배포를 중단하고, 몇 주 몇 개월에 걸쳐서 제보된 더미파일들을 하나하나 다 잡아가며 수정판을 올리게 되었다.그렇게 1년을 넘게 개고생하며 온전한 파일에 가까운 파일을 올렸을 때는 (그마저도 100% 완벽히 크래킹하지 못하고 간신히 플레이 가능한 수준) 이미 기다리다 지쳐 정품을 구매한 이들이 한가득이고, 이미 철이 지나 아무도 찾지 않는 게임이 되어버린 후였다.락은 언젠가 뚫리기 마련이지만, 그동안 게임 제작사는 판매 할 만큼 하고, 이제 끝물이니 세일행사까지 하는 판국에 어디에 버그가 있는지도 알 수 없는 크랙판을 하느니 그냥 정품 사고 만다! 는 사용자들이 늘어가게 되었다.헤헤 우리 락 깨느라 개고생했어?ㅎㅎ 이미 그게임 팔릴만큼 다 팔렸고 우린 로열티 다 받았지롱!기존 대작 게임들은 길어도 일주일이면 버티지 못하고 복제판이 풀려버리는 바람에 충성도가 높은 골수팬들이나 게임을 구매해 즐기는 상황의 게임 업계에서는 고무적인 일이었다. 크래커 그룹들은 패배감에 젖어 백기를 들었다.락은 길어도 몇 주만 매달리면 뚫는다는 확신이 있었는데 이 전대미문의 데누보라는 방패는 언제 뚫리는지 도무지 가늠조차 안되는 것이었다.이들은 크래킹을 기다리는 복돌이들에게 큰 기대는 하지 말라면서, "우리가 완벽히 크래킹하기를 기다리느니 정품을 사는게 더 이득일 것" 이라고 했다.'우리가 못 뚫는 락은 없다' 고 자부했던 3dm은 이를 갈며 데누보 v3 을 깨부수기 위해 덤벼들었다.그러나 데누보 v3를 깨기는 커녕 뚜드려 보기도 전에 데누보사는 v4 를 내놓았다.(심지어 v3도 이제야 감이나 좀 잡아가려던 참임)그러던 중, 복돌이들의 신이었던 3DM 그룹이 중대 발표를 하게 되는데, "내부 회의 결과 설날 이후로 어떤 싱글 게임도 크래킹하지 않겠다" 고 선언하면서, "1년간 휴가를 가서 재충전 겸 상황을 지켜보겠다" 고 말해 사실상 패배를 인정해버린 것이다.3DM 광신도들은 광분해서 "니들 데누보 못 뚫어서 짜지는거 아니야?" 라고 조롱하기 시작했고 3DM 은 발끈해서 "하 아니거든? 우리가 데누보 뚫는거 보여줌 기다려봐라"라는 말을 남겼지만 데누보를 뚫은 게임은 하나도 업로드되지 않았다.제일 실력있다고 평가받던 3DM이 돌아오지 않고, 손을 놓아버린 것으로 판단되자, 다른 크래커 그룹들도 대부분 포기선언을 한다.기나긴 창과 방패의 싸움에서, 매일 뚜드려 맞기만 하던 방패가 드디어 감격적인 첫 승리를 거머쥐는 순간이었다.4. 그런데 지금, 그 데누보가...데누보라는 극악무도한 락 앞에, 복돌유저들은 광광 울 수밖에 없었다.내가 즐기려고 점찍어둔 게임에 데누보 락이 적용된다는 소식이 들린다면, 그 게임은 무조건 구매를 해야만 즐길 수 있는 상황이 되어버리는 것.세계의 복돌 유저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데누보 사에 폭파협박, 살해협박 등의 메일을 보내고, DDOS 등의 공격을 시도했지만 데누보 사는 콧방귀를 뀌며 "사람은 원래 화가 나면 불같은 법이다. 이해한다" 며 광역도발을 시전하여 복돌이들을 부들부들하게 만들었다.그런데, 2016년 7월, 철통 방어를 자랑하던 데누보 v4를 완벽하게 무력화 시켰다는 소식이 레딧을 강타한다.(이는 현재진행형임)데누보를 정공법으로 뚫은 것은 아니고, 이 방패가 워낙 강력하다보니 방패로 보호받는 자물쇠를 공략하느니 문의 경첩을 뜯어내버리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들은 정품을 온라인으로 구매한 후, 특정 프로그램을 통해 필요한 소스를 추출한 다음, 게임에 덮어씌우는 방식을 택했다. 그리고 환불 정책에 의거 구매한 게임을 환불조치하고, 게임은 불법복제판으로 계속 즐기는 것이다.실제로 데누보 v4 락이 적용된 파크라이 크라이멀 등이 완벽하게 뚫리고, 실제 정상구동 후기들이 올라오는 상황.복돌이들은 새로운 희망을 품고 토랭이 사이트에서 대기중이다.직접 위 방법을 사용하던가, 위 방법을 통해 릴리즈 된 크랙버젼이 올라오길 기다리면 되니까...오랜 기간 창이 이기던 싸움에서 존나 일기방패 급으로 강력한 방패가 나와서 이 싸움에 종지부를 찍는가 싶었는데 다시 전세가 역전되기 일보직전이다.과연 창이 다시 방패를 깨부술지, 이 변칙공격을 막아낼 새로운 형태의 방패가 등장할 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복돌이들은 말한다"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작성자 : 루갤러고정닉
우크라의 히틀러..스테판 반데라와 볼히니아 학살
스테판 반데라(Stepan Bandera, 1909년 12월 1일 ~ 1959년 10월 15일).오늘날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크라이나 현대사의 가장 어두운 면모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민족주의가 가장 부정적으로 물들 경우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합니다.1. 배경1-1. 중세로부터 20세기까지타타르의 멍에가 시작되고 키예프 공국은 몽골에 의해 무너졌습니다.루스인들은 몽골과 투르크계 타타르의 지배를 받게 되고, 상대적으로 영향이 덜한 서쪽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적은 영향으로 문화 분리가 일어나게 됩니다.이때 갈리치아 공국과 볼히니아 공국은 지주들의 힘이 강하고 헝가리와 폴란드의 문화 영향을 받는 지역이었습니다.둘은 합쳐져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이 되었고 이후 루테니아 왕국이 되었습니다. (왼쪽 아래 우측의 국장은 키예프 공국의 국장을 계승했습니다. 현재는 우크라이나의 국장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하지만 루테니아 왕국의 쇠락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확장으로 결국 이 지역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이때부터 폴란드인 귀족들과 지주들은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루테니아 농민들을 지배하며 민족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러시아 제국의 지배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대다수의 토지는 폴란드인 지주들의 것이었고 소작농들은 가난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두 민족 간 중재는 유대인 공동체들이 맡았는데 잘 이뤄질 때도 있었지만 때로는 둘 모두에게 증오만 받고 끝나기도 했습니다.19세기부터 농민과 노동자 계층에게까지도 민족주의가 퍼지며 우크라이나 공동체의 주권 열망이 두드러지고, 마침내 러시아 제국의 혼란이 극에 치닫으며 1917년 러시아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자 케렌스키 정부에 연방 개편 요구의 동의를 얻게 됩니다.그리고 10월 혁명이 벌어졌습니다.볼셰비키는 제헌의회를 폐지하고 모든 사회주의 정당들을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혼란과 봉기 속에서 동유럽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빠르게 무너져갔습니다.당연히 이들은 동유럽 지역의 봉기와 독립시도를 인정할 수 없었고 현지인 볼셰비키로 이루어진 괴뢰 체제를 앞세워 진압을 시도했습니다.하지만 우크라이나의 키예프 라다조차 제압에 실패하며 결국 전쟁 수행 의지를 잃고 독일 제국과의 조약을 통해 동유럽 민족들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습니다.이번에도 당연한 소리지만 독일이 무너진 뒤 조약은 파기됐고 소비에트는 모든 동유럽 신생 국가들을 향한 침공을 개시했으며 러시아가 동유럽의 독립을 인정할 뜻이 없음을 확인한 폴란드가 우크라이나를 침공중이던 소비에트군에 선제 공격을 가하면서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이 시작됐습니다.전쟁이 길어지며 양측 모두 경제적 피해가 극심해졌고 러시아 내부에서 무리한 전쟁에 대한 비판 목소리가 고조되자 끝내 1921년 리가 조약을 통해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서쪽 지역이 폴란드에 양도되는 조건으로 둘은 합의를 보았습니다.폴란드 제2공화국은 당장은 국가안전을 얻어낼 수 있었지만 폴란드만 믿고 있던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인들은 졸지에 실향민이 되며 이를 배신으로 여겼습니다.다시 한번 국가를 잃어버린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 인사들은 이후 비참한 꼴로 전락했습니다.이것은 현재까지 이어질 우크라이나의 급진 민족주의의 계기가 되었습니다.배경은 이전부터 존재했다지만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모든 문제가 시작됐죠.(영화 증오, 2016 中.)1-2. 폴란드의 지배이 시점에서 폴란드인 지주들과 루테니아계 피지배민족의 갈등은 더욱 격화됩니다.단순한 지주 계급과 농민 계층의 갈등에서 정치, 문화, 민족적인 충돌로 이어졌죠.폴란드 제2공화국은 불안정한 신생국가였고 새로 편입된 영토의 다른 민족들을 빠르게 동화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정교회 성당은 철거되고 가톨릭 개종과 폴란드어 교육이 강요되며 루테니아계 민족들은 새로운 압제를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폴란드-리투아니아라는 역사적 배경이 있었음에도 빌뉴스 사태로 리투아니아인들과도 척을 진 상태였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묘한 민족적 앙금으로 남아있습니다.)그리고 이때 나타난 인물이 바로, 스테판 반데라입니다.2. 스테판 반데라의 초기 생애1909년 12월 1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태어난 반데라는 폴란드의 우크라이나인 민족주의 청년 단체에 가입하는 등 젊어서부터 민족주의적 사관을 갖고 있었고 1928년엔 민족주의 학생단체 '자유 우크라이나 조합(Union of Free Ukraine)', 1929년에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rganization of Ukrainian Nationalists, OUN)에 가입했으며 특유의 조직력으로 빠르게 조직 내 지지를 얻어 3년 뒤 폴란드 내 대표단 총 책임자 지위를 얻게 됩니다.이듬해 OUN의 폴란드 내 최고지도자가 되면서 그는 폴란드 정부를 향한 각종 저항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내무장관을 암살하고, 당국에 협조한 우크라이나인 동포들에게 테러를 가하고, 독립전쟁 때 우크라이나군을 지휘했던 민족영웅인 이반 바비를 고등학생의 OUN 가입을 막았다는 이유로 살해하기도 했습니다.아이러니하게도 반데라가 어린나이에도 이렇게 빠르게 지도자가 될 수 있던 이유는 폴란드 당국의 계속된 탄압으로 구세대에 속한 노장층 OUN 지도자들이 계속 체포되어 심각한 지도부 공백상황이 만들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결국 1934년을 넘기지 못하고 당국에 체포된 반데라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구심점을 잃은 OUN도 약화되고 당장은 잠잠해진듯 보였습니다.나치가 오기 전까진 말이죠.3. 나치 독일과의 협력과 최후소련과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해 분할하였고 폴란드에 점령당한 동쪽 지역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계 민족들은 다시 러시아인의 지배에 놓였습니다.반데라는 이러한 혼란 속에 석방되었고 크라쿠프에서 OUN과 다시 접선하였습니다.이때 OUN을 이끌던 인물은 온건파인 안드리 멜니크(Andriy Melnyk)로, 그는 점진적인 독립을 추구하였으나 반데라를 따르는 급진파는 더 적극적이고 극단적인 수를 써서라도 저항과 독립운동을 이어나가고자 했습니다.반데라 파는 '우크라이나 혁명 민족주의자 조직(OUNR, 통칭 OUN-B)' 라는 독자적인 세력으로 분리되었습니다.그리고 소련 침공을 준비하던 나치 독일이 이들을 주목하게 되면서 모든 비극이 시작됩니다.유고슬라비아 침공에서 우스타샤를 통해 현지 민족주의 단체의 포섭으로 재미를 본 독일은 이번에도 같은 수법을 쓰고자 했습니다.이들은 우크라이나 독립을 용인하는 조건으로 장비와 물자, 자금을 후원할 것을 약속했습니다.그리고 마침내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됩니다.저 많은 환영인파가 보이십니까?서부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독일군은 현지 주민들에게 열렬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왜일까요?폴란드의 지배에 있던 서부 우크라이나와는 달리 소련에게 편입되었던 다른 우크라이나 지역은, 홀로도모르라는 끔찍한 경험을 겪었습니다.우크라이나 측의 주장과는 달리 고의적인 인종 청소 목적의 제노사이드였다는 주장은 아직 학계에서도 논쟁이 분분하지만 적어도 한가지는 확실합니다.스탈린이 강압적으로 밀어붙인 집산화 정책과 정치적 탄압은 인위적인 거대한 기아를 초래했습니다.평균 수명은 남아 7세, 여아 10세로 줄어들고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시체를 뜯어먹었으며 우크라이나 지역 전역에서 아이들이나 이방인을 죽여 살을 벗겨낸 뒤 이를 거래하는 인육 시장이 활발히 열리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결과적으로 이는 수백만명의 아사자를 발생시켰습니다.참고로 가장 심각한게 우크라이나였으니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주로 주목받지만 실은 이때 소련의 농업정책은 너무나 처참했던 나머지 다른 지역에서도 끔찍한 기근이 초래됐습니다.북캅카스로부터 러시아 남부지역, 카자흐스탄, 타타르스탄, 여러 지역에서 천만 하고도 수백만이 또 굶어죽는 생지옥이 펼쳐졌죠.폴란드의 지배를 받고 있던 서부 우크라이나는 이러한 참극을 모두 전해듣고 있었습니다.그런 그들이 이제 소련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됐을때, 소련은 토지 개혁과 산업 국유화라는 명분으로 지역 사회 구조를 공산주의 이념 아래 파괴하고 강압적인 탄압과 지식인의 대규모 체포 및 처형을 자행했습니다.이 모든 일은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과 서부 벨라루스 지역이 독일군을 해방자로 받아들이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히틀러 만세! 반데라 만세! 우크라이나 독립국이여 영원하라!"반데라와 OUN-B는 이동 학살 부대인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과 협조하여 대대적인 유대인 색출과 반유대인 선전에 적극 참여했습니다.그리고 키예프가 독일군에게 함락되자 반데라와 그의 세력은 독일 당국과의 사전 논의 없이 일방적인 우크라이나 독립 국가의 수립을 선포합니다.독일은 어쨌든 우크라이나인으로 이루어진 게릴라가 알아서 현지의 폴란드인과 유대인을 솎아내길 기대했긴 하지만, 이렇게 독단적인 행동은 심기를 거스르는 행위였습니다.독일이 원한 것은 어디까지나 레벤스라움의 일부가 되기 위한 자원 공급지이지 독립열망에 불타는 신생 국가가 아니었습니다.1941년 7월 5일 게슈타포는 반데라를 체포해 가택 연금했고, 협력 동의를 얻어내지 못하자 9월 15일 반데라와 주요 간부들은 부헨발트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하지만 독일의 의도와는 달리 OUN-B 잔존세력은 미콜라 레베드(Микола Кирилович Лебедь, 1909. 1. 11. ~ 1998. 7. 18.)에 의해 새롭게 결집하여 우크라이나 반란군(Ukrainian Insurgent Army, UPA)으로 재조직됩니다.이들은 독일군과 소련군 모두를 침략자로 규정하는 한편 극단주의로 물들어 우크라이나인들의 민족감정을 부채질해 폴란드인 지주와 유대인들을 향한 증오를 폭발시켰습니다.잔혹한 학살이 곧 볼히니아와 동갈리치아를 뒤덮었습니다."폴란드인 없는 우크라이나" 라는 미명으로 수백년에 걸쳐 누적된 폴란드인을 향한 증오가 모든 일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폴란드인이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의 대상이 되었으며 태아를 꺼내 죽이는 등 잔혹함에 주저가 없었습니다.당연히 중간 계층이던 유대인 공동체도 척살 대상이었고 소수민족으로 섞여있던 아르메니아인들도 솎아내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처음에는 이들을 포섭하려고 했던 독일 역시 이러한 민족주의자들의 대두에 위기를 느끼고 탄압을 시작했지만 학살을 멈추려 한 건 아니라서 큰 차이는 없었습니다.당연하지만 폴란드인들도 맞기만 한 건 아닙니다. 그들 역시 복수심에 저항과 보복을 이어나갔습니다.학자들은 대략 12만 명의 폴란드인이 학살당하고 이들의 보복 학살로도 훨씬 적긴 하지만 우크라이나인 2만 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합니다.소련군이 진군해오기 시작하자 이들은 소련군도 침략자로 간주하고 파르티잔 운동을 벌여 장성을 암살하는 등 지역의 최대 골칫거리로 작용하였습니다.이때 즈음 독일은 불리해진 전황 탓에 이들을 회유하고자 반데라를 다시 석방하고 협상을 벌여 독립적인 민족위원회와 자치 군대 설립 약속을 받아내지만 뭐, 1944년 이후 독일이 어떻게 됐는지는 다들 아실 겁니다.NKVD는 대대적인 수색과 진압 작전을 벌여 UPA 대원과 연루된 민간인들을 대거 처형하거나 시베리아 수용소로 이송했습니다.정확한 수치는 불명이나 자료에 따라선 대략 수십만명이 휘말린 것으로도 나옵니다.전쟁이 끝나고도 UPA는 50년대까지 반소운동을 지속했지만 이런 압박과 지도부의 분열 속에 와해되어 갔습니다.반데라는 서독으로 망명해 반공 활동을 이어가다 1959년 10월 15일 아파트 앞에서 KGB 공작원에게 시안화칼륨 가스로 암살당하였습니다.4. 우크라이나의 재독립과 반데라주의의 대두1991년 우크라이나 독립투표를 통해 우크라이나의 재독립이 이뤄졌습니다.본래는 고르바초프의 연방 개혁에 발맞춰 개편된 연방 체제 내에서 주권 확보와 자치권 확대를 목표로 사회운동이 벌어지고 있었으나 8월 쿠데타를 거치며 소련 체제 자체가 더이상 존속이 불투명해지면서 우크라이나는 연방을 탈퇴했고 소련은 해체되었습니다.이후의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악화(다들 잘 아시다시피 우크라이나는 부패율도 매우 높고 유럽 최빈국이기도 합니다.) 속에서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반데라가 다시 민족주의적 시선에 따라 우상화가 시작된 것은 거의 필연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하지만 큰 호응을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2009년 여론조사에서도 알 수 있듯 OUN-B와 UPA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항상 과반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지역별로 살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극심한 학살을 겪은 볼히니아와 갈리시아가 긍정 반응이 두드러지지만 같은 서부여도 부코비나와 트란스카르파티아에서는 긍정 견해가 큰 힘을 얻진 못하는 모습을 보입니다.그 외 지역은 수도 키이우를 포함해 대부분이 부정적 의견이 압도적입니다.그러나 이런 기조는 러시아와의 충돌이 시작된 이후 변화했습니다.크림 병합과 돈바스 전쟁으로 인해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피란길에 오르고 실향민이 되었습니다.(이 과정에서 마리우폴은 피난 온 돈바스 실향민들이 대거 정착하면서 새로운 중심도시가 되었습니다.)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러시아와의 대립과 국가 존망의 위기를 실감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인지, 2022년 4월 여론조사에서는 많은 변화가 나타납니다.소련에 대한 인식이 크게 부정적으로 변하고 소련적인 이라는 이미지는 러시아적인 이미지로 변화했으며 87%의 응답자가 소련을 더이상 그리워하지 않는다 답하였고 특히 OUN과 UPA에 대한 긍정 답변은 2015년 이후 두 배로 증가하여 81%에 달했습니다.스테판 반데라에 대한 답변이 가장 크게 두드러지는데, 2012년엔 불과 22%만이 긍정 답변을 나타내던게 2022년 시점에서는 74%까지 늘어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흥미롭게도 기존의 22%는 원래부터 긍정 답변 대부분을 차지한 볼히니아와 갈리시아가 주를 이룬다는 걸 감안할 경우 나머지의 절대적 지분은 중부와 동남부에서 왔다는 소리인데, 전쟁으로 인해 직접적으로 피해에 노출되고 민간인 피해가 잇다른 것이 영향을 줬을 거란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정말이건 아니건 이 영향으로 기존 친러 지역으로 흔히들 분류되던 하르키우와 드니프로에서는 도로명에 반데라를 붙이는 촌극도 벌어졌습니다.(민족 정체성 응답도 특이한데 2008년부터 꾸준히 안정적인 수치를 보였습니다. 2008년부터 2014년까진 83%가 스스로를 우크라이나인으로, 15%가 스스로를 러시아인으로 답변했으나 2014년 이후 러시아인 응답자는 11%로 감소했고 현재는 5%만이 남은 반면 우크라이나인으로 답변하는 응답자는 92%에 도달했습니다.)반데라 긍정 답변이 늘어나는 것은 안 좋은 일이지만 다행히도 우크라이나 내 다른 민족에 대한 답변도 긍정 비율이 우세하게 나타납니다.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13%만이 부정적이고 유대계와 헝가리계에게도 긍정적 답변이 우세합니다.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인 자체를 바라보는 시선은 긍정 30% 부정 27% 중립 39%로 어느 의견도 뚜렷한 우세가 나타나지 않습니다.러시아와의 충돌이 본격화되면서 이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중부, 동남부 지역에서 반데라가 반러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고 이것이 반영된 결과로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만 이러면 자칫 반데라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여러 우려가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아조프 부대에 입대해 참전한 21세 러시아인 아르티옴 쉬로보코프, 2015년. )우크라이나는 과거에도 그랬듯 지금도 단일 민족 국가가 아닙니다. 이런 경향은 긍정적으로 보기가 힘듭니다.러시아와 충돌이 시작된 이후 우크라이나의 정세 불안과 민족에 대한 혼란한 시각이 겹치면서 이러한 민족주의의 대두는 불안 요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2022년 7월엔 주독 우크라이나 대사가 반데라를 영웅이라 칭했다가 해임되었으며, 우크라이나 총사령관을 맡고 있던 발레리 잘루즈니가 직접적으로 반데라에 대한 지지와 옹호 발언을 이어나가기도 했습니다.잘루즈니는 현재도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지지를 받으며 차기 대권주자로 여겨지고 있는데, 그는 현재 우크라이나 강경 보수파를 대표하는 인물로도 여겨지고 있습니다.유대계이자 러시아어 구사자이기도 한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드러낸 바가 있습니다만, 전쟁 상황에서 반데라주의의 확산을 막는 것은 요긴해보입니다.물론 긍정 시선만이 존재하는 건 아닙니다. 미사일 폭격에 직접 노출되어야 하는 동부 출신 피난민들이 반데라 기념행사에서 이런 게 러시아를 더 자극하고 자신들이 피해를 입어야하는데 안전한 서부에서 이런 일을 벌이냐고 항의한 사례가 대표적입니다.그렇지만 전체적 흐름은 여전히 우향우를 직행하고 있습니다.당연히 폴란드에선 강력 반발하고 있습니다.필요하기에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것이지만 역사적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진 절대로 나토 가입에 동의해줄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하며 우크라이나를 압박하여 수차례 사죄를 요구하고 협의를 끌어내기도 했습니다.그렇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폴란드가 1939년 나치와 협력하여 동유럽에서 학살을 일으켰다는 주장을 하며 폴란드에 대한 역사왜곡과 나치 비하 발언을 이어나갔습니다우크라이나를 향한 나치즘의 부각과 탈나치화 명분 역시 반데라주의로 인한 것으로, 반데라가 나치와 협력하였던 극우 민족주의자이기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를 청산하겠다는 명분입니다.러시아군의 네오나치 부대원이나, 세계 각지의 대안우파 성향 네오나치 단체가 적극적으로 러시아에 대한 지지와 동경을 표방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을 함구하고 있습니다만.전쟁과 혼란한 현대사로 복합적인 시선을 받고 있는 인물이지만, 스테판 반데라를 향한 제 개인적 견해는 단순합니다.반데라는 절대로 영웅시되어선 안됩니다.그것은 학살에 대한 면죄부가 될 뿐이지, 결코 민족에 대한 긍정이 되진 않을 것입니다.출처-펨코
작성자 : 배터리형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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