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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임용된 원민경 여가부 장관 근황
요약1. 앞으로는 민간 기업에도 "성평등한지" 감시하는 제도를 도입하여 여성임원 비율 높이도록 압박 줄 것이다2. 비동의 강간죄 적극 도입할 것이다3. 성매매는 구매자만 처벌해야 한다4. 군가산점은 위헌이라 못준다와.. 진짜 역대급으로 편파적인 정치인 등장함이제 한남의 미래는 없다- 성평등부 장관 발언 레전드네ㅋㅋㅋ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5782444그는 "한국 남성은 군대 가기 전에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서 성 구매 현장에 가는 폭력적인 기억의 과거가 있고, 그게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다. 산업계 전반에 유흥업소에서의 접대도 굉장히 일반화돼 있었다"며 "이러한 문화는 우리가 지향하는 성평등한 사회와 큰 간극이 있다"고 짚었다.이어 "이미 25년 전에 성매매가 갖는 착취적 성격에 대한 이해 위에 성구매자만 처벌하는 법이 스웨덴을 시작으로 유럽에서 확산하고 있다"며 성매매 피해 여성에 대한 비범죄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그는 "자발적 성매매도 있다고 하지만 사회 구조적인 불평등으로 인해 여성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결과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자발이라기보다는 구조적인 성매매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성평등부 장관이라는 사람이 군대간 한국남자들 전부 업소남으로 만들어버리네ㅋㅋㅋ
작성자 : ㅇㅇ고정닉
21세기 최악의 전쟁, 시리아 내전
https://youtu.be/n8AaIg1YPU4?si=kJwkFKrLgdrUuMra 지금으로부터 1년 전인 2024년 12월 8일, 중동의 시리아에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날 아침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은 러시아로 망명을 갔고, 머지않아 반군이 대통령궁을 장악하며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이는 14년간 이어진 끔찍한 내전의 종결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2011년부터 시작된 시리아 내전은 현재도 21세기 최악의 전쟁 중 하나로 거론된다. 넉넉히 잡아도 4개의 서로 다른 세력과 그보다 더 많은 외부 국가들이 연루된 이 전쟁으로 60만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고, 여기서 파생된 난민 위기는 세계 정치판을 바꿨다. 중동의 모든 갈등을 한 곳에 담아둔 듯한 시리아 내전은 왜 일어났고,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어떻게 끝났을까. 시리아는 근본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이권을 위해 급조된 나라다. 국민의 80% 이상이 민족적으로 아랍인에 속하지만, 10%의 쿠르드인과 5%의 튀르크인, 그 밖의 기타 소수민족들 역시 존재한다. 종교 지형은 그보다도 더 복잡한데, 우선 인구의 4분의 3 가량이 이슬람 수니파다. 인구의 12%는 서부 해안가 지역에 주로 거주하는 알라위파로, 시아파와 유사하면서도 다른 이슬람 종파다. 3% 정도는 시아파를 비롯한 기타 이슬람 종파 신자들이고, 나머지 10%는 북서부에 밀집한 기독교도들과 남부의 이슬람 파생 종교인 드루즈교 신자들로 구성된다. 이런 다양한 민족적, 종교적 인구 구성은 시리아의 통합을 저해하며 안 그래도 취약한 나라를 더욱 불안정시켰다. 이런 시리아에서 1970년 하페즈 알아사드 장군이 쿠데타를 통해서 집권에 성공했다. 알라위파 출신이었던 아사드는 권력을 공고히 다지기 위해서 자신과 같은 알라위파들에게 요직을 나눠줬고, 기독교도와 드루즈인들에게도 권력을 분배했다. 하지만 수니파 부족의 원로들 역시 포용하며 그들의 불만을 최대한 달랬다. 아랍사회주의자였던 아사드는 자신을 반대하는 공산주의자들과 이슬람주의자들을 억압하면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다. 아사드 정권은 1970년대 석유 자원 개발에 나섰고, 이후 오일 쇼크의 수혜를 받으면서 경제를 부분적으로 성장시켰다. 중산층이 형성되었고 국민의 삶의 질은 객관적으로 나아졌다. 아사드는 비밀 경찰들을 파견하며 철권 통치를 실시해 그의 30년 집권 기간 동안 대체로 정치적 안정을 확보했다. 허나 아사드의 소수종파 우대 정책은 필연적으로 수니파 국민들 사이에서 소외감을 유발했고, 지나친 억압 정책은 국민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특히 하마시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해 4만 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하페즈가 사망한 이후, 안과 의사 출신이던 그의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바샤르는 하페즈 말기부터 조금씩 바뀌던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완전히 자본주의로 대체하는 경제 개혁을 실시했다. 개혁과 개방은 관광 산업을 활성화 시키고 투자를 유치하면서 시리아의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사회 안전망이 축소되고 실업률이 증가했으며,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부패가 늘어나는 부작용도 만만찮았다. 바샤르는 임기 초 서방과 관계 개선을 시도했으나, 911 테러를 겪은 미국과 외교적 마찰을 빚으며 경제 제재를 당했다. 이에 그는 전통적 우방인 러시아는 물론이고 당시 반미의 선봉장에 시아파의 맹주 노릇을 하던 이란, 기타 역내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했다. 이 국가들은 아사드에게 돈을 대주면서 상술한 개혁 개방 정책의 원동력이 되었다. 바샤르의 개혁과 개방 정책은 분명 경제 전반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사회 전체의 부를 증대시켰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빈부 격차 확대와 사회 안전망 축소 등 불안한 신호들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2007년부터 2011년까지 시리아 건국 이후 최악의 가뭄이 닥쳤는데, 정부는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아사드 가문의 40년 집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은 점점 쌓이고 있었고, 장작에 누군가 불만 던지면 화르르 타오를 형국이었다. 그리고 그 불씨는 이역만리에서 시작되었다. 2010년 12월 17일, 경제적 어려움으로 무허가 장사를 하던 한 튀니지 청년이 공권력에 의해 탄압받자 분신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독재 정권 치하에서 경제적 고난까지 겪던 튀니지인들은 폭발했고,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났다. 궁지에 몰린 튀니지의 독재자는 진압 명령을 내렸으나, 군부는 거부했다. 결국 튀니지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로 도주했고, 튀니지는 시민들이 주도하는 과도 정부가 들어서며 민주화 되었다. 이 사건은 큰 파장을 몰고 왔다. SNS로 튀니지의 상황이 역내 다른 국가들의 국민에게 퍼졌고, 반정부 시위가 이집트와 리비아에서 바레인과 사우디아라비아까지 들불처럼 번지는 계기가 되었다. 아사드의 시리아에서도 2011년 1월 말부터 산발적으로 반정부 시위가 발생하고 있었다. 본격적인 내전은 2011년 3월 6일, 시리아 남부 다라 시에서 열다섯 명의 소년들의 장난으로 시작됐다. 이들은 벽에다가 '다음은 네 차례야, 의사'라는 장난성 메세지를 적었다. 안과 의사 바샤르의 병사들은 해당 소년들을 구금한 후 고문했다. 소문이 퍼져나갔고, 분노한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길거리에 나섰다. 시위대는 처음에는 비상사태 중단과 자유화, 부패 척결 등의 조치를 요구했다. 하지만 아사드는 사태가 튀니지처럼 될 수 있다고 경계했고, 부분적인 개혁을 약속하면서도 강경 진압을 명령했다.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체포와 간헐적인 발포가 일어났고, 그럴수록 시위대의 저항도 격렬해졌다. 4월 말부터 탱크가 투입되면서 상황이 매우 심각해졌고, 시위대도 점차 무장을 들기 시작했다. 반정부 시위가 내전으로 변신하고 있었다. 아사드는 이런 와중에 수감된 이슬람주의자 포로들을 석방시켰다. 이 시점에서 내전을 직감하고 있던 그는 이슬람주의자들이 반정부 세력을 분열시키는 한편 자신에게 이슬람주의와 맞서 싸운다는 명분을 제공할 수 있다고 봤다. 수백 명의 전문적인 지하디스트들이 시위대 사이로 섞이면서 무장 반란을 준비했다. 시리아가 정치적 혼란에 빠지면서 종파와 계급 간 갈등이 드러났다. 수니파 국민들은 대부분 반정부 시위를 지지하고 나섰으나, 압박감을 느낀 알라위파와 기독교도들은 대체로 아사드를 지지했다. 계급적으로도 서민들이 주로 아사드 퇴진을 요구한 반면, 중산층은 정치적 혼란을 우려하며 조용히 정권을 지지하는 경우가 다수였다. 2011년 7월, 아사드군에서 이탈한 군인들은 마침내 '자유시리아군(FSA)'의 이름 하에 반정부 군대의 창설을 발표했다. 이들은 시위대가 장악한 도시 내 지역들을 중심으로 거점을 형성하며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아사드 타도를 주장하던 시민들이 FSA 조직들에 합류하면서, 내전이 본격적으로 격화되었다. 그러나 FSA는 서로 다른 반란군 조직들이 하나의 통일된 브랜드를 쓰는 것에 가까웠다. 수백 개에 달하는 반군 단체들은 제대로 된 연계 작전을 꾸밀 능력이 없었고, 노선의 차이나 사소한 갈등으로 서로 총질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기에 단체들의 군사적 역량도 미약한 등, FSA는 그 태생부터 한계가 명확한 단체였다. 이에 비해 비슷한 시기에 결성된 이슬람주의 반란군들은 활동 경험이 풍부한 고위 이슬람주의자들에게 주도되었다. 알카에다 소속 아부 무함마드 알-줄라니가 자신이 성전을 벌이던 이라크에서 부하들과 건너와 알누스라 전선을 창설했다. 누스라 전선은 알카에다의 지원을 받으며 이슬람주의 계열 반군은 물론 모든 반란군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반군을 진압해야 하는 정부군도 상태가 안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시리아군은 실전 경험이 30년간 없었고, 부패가 극심해 군대의 질적 수준도 떨어졌다. 도심 내 시가전에 대한 공략법도 몰랐고, 병사들의 사기도 저조했다. 정부군은 내전 초기 반군에게 여러 지역에서 패퇴하는 졸전을 보여줬고, 아사드는 알라위파 민병대에게 손을 벌려야 했다. 한편 북부의 쿠르드족 역시나 혼란을 틈타 봉기했다. 쿠르드족은 여러 지역에서 행정을 장악하고 자치를 선포했다. 시리아 쿠르드의 안전을, 장기적으로 자치나 독립을 꾀하던 이들은 정부군과의 충돌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무력 사용을 꺼렸다. 오히려 이슬람주의 반군과의 교전이 더 잦은 편이었다. 쿠르드족은 내전의 제3세력으로 등극했다. 시리아 내전은 초기부터 각종 외세의 개입으로 점철되었다. 중동에서 유일하게 러시아의 우방이던 아사드는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으로부터 대대적인 군사 지원을 받았다. 시아파의 맹주 이란은 아사드의 몰락을 지켜볼 수 없었다. 이란 신정은 대규모 병력과 군수 물자 지원은 물론, 자국이 거느리는 수만 명의 시아파 민병대들을 파병했다. 그 중 가장 강력하고 독립적인 레바논의 무장세력 헤즈볼라 역시 2만 명의 병사들을 시리아로 파견했다. 그 밖에도 시아파가 집권한 이웃 나라 이라크, 사회주의권 동맹인 중국과 북한이 소규모 지원을 실시했다. 미국과 유럽은 반군, 그것도 주로 FSA 계열 반군을 지지했다. 오바마는 아사드가 화학 무기를 사용할 때만 직접적으로 개입하겠다고 선을 그었다. 서방은 그 대신 아사드를 제재하고, 일부 반군 세력을 상대로 무기와 훈련을 제공했다. 시리아와 이웃한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정부 역시 반군을 열정적으로 지지하며 거처도 제공했고, 걸프만의 아랍 왕정들도 아사드를 무너뜨리기 위해 반군이 어떤 성향인지 가리지 않고 무기와 자금을 댔다. 체첸과 이라크, 위구르와 사우디아라비아 등 세계 각국의 이슬람주의자들도 성전을 벌이기 위해 시리아로 건너갔다. 정부군은 전쟁 초기 각지에서 열세에 놓였다. 각지에서 일어난 반군은 수도 다마스쿠스와 알레포, 다라를 비롯한 주요 도시들에서 최소한 부분적인 영토는 장악했다. 미숙한 정부군은 전차를 비롯한 여러 귀중 장비들을 반군에게 그대로 넘겨주면서 이들의 화력을 보강했다. 반군은 2013년 초까지 주요 도시들의 일부 구역과 북부 지역을 휩쓸었다. 위기에 처한 아사드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서 이를 저지하려고 했다. 통폭탄은 드럼통 안에 각종 금속 쓰레기를 넣는 방식으로 제조된 폭탄으로, 정부군에 의해 줄기차게 쓰였다. 그러나 이 폭탄은 민간인 희생자들을 양산하며 논란이 되었다. 정부와 그 지지자들은 물자가 부족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반박했다. 위험한 수단으로 민간인 거주지를 대대적으로 폭격한 결과, 아사드는 최소 20만명에 달하는, 반군 연합보다 40배는 더 많은 민간인을 죽였다. 아사드는 심지어 반군과 민간인이 모인 지역에 생화학 무기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는 오바마가 설정할 레드라인을 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바마는 여전히 개입하지 않았다. 그는 그 대신 러시아와 협력해서 화학 무기를 폐기하기로 했다. 아사드는 미러 양국의 지시를 이행하는 듯 했으나, 실제로는 여전히 화학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2013년 중순이 되자,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다. 정부군 연합과 반란군 연합이 서로 지리멸렬한 소모전을 벌이면서 어느 한쪽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민간인들의 피해가 점차 커졌고, 이들은 처음에는 전쟁에서 안전한 곳으로, 이후 점차 외국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앞으로 몇 년간 세계를 뒤흔들 제4의 세력이 등장했다. IS라는 약칭으로 유명한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는 원래 오사마 빈 라덴이 창설한 국제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 단체인 알카에다의 이라크 지부로 시작했다. 이라크 지부의 지도자인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는 자신의 조직을 강화하는 한편, 시리아에 알누스라 전선을 이끄는 알-줄라니를 파견하면서 시리아 내전에도 개입키로 했다. 그러나 바그다디에게는 알카에다 지부장보다 훨씬 큰 야망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지도 하에 이슬람 세계를 통일한 칼리프국을 세우고자 했다. 2013년 4월 13일, 바그다디는 알누스라 전선과 이라크 지부가 통합해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IS)로 재탄생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알카에다 지도부의 의중이 아니라 바그다디의 독단적인 결정이었다. 바그다디의 선언은 알누스라 전선과 알카에다 지도부 모두를 당황시켰고, 알카에다는 바그다디가 경솔했다고 질책했다. 그러나 바그다디는 자신의 선언을 철회하지 않으며 오히려 알카에다에게 정면으로 도전했다. 시리아의 바그다디 추종자들은 알누스라 전선에서 이탈해 바그다디의 직속 부하가 되었고, 알누스라 전선의 영토를 신속히 점령했다. 알누스라 전선이 이슬람 근본주의 정책을 전면 도입하지 않은 반면, 바그다디와 IS는 반발을 무릅쓰면서 점령지에 샤리아 율법을 강제했다. 이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열정적으로 IS에 합류하는 계기가 되었다. IS는 알누스라 전선을 비롯한 다른 반군 조직 역시 적극적으로 공격하면서 제4의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이들의 본거지인 이라크에서도 2013년 12월 30일 봉기를 일으키며 대대적인 내전을 일으켰다. 2014년 2월 3일, 알카에다는 자신들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난 IS를 마침내 공식적으로 파문했다. IS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역시나 완전한 독립을 선언했다. IS는 시리아에서 동북부 지역을 장악하는데 성공했고, 이라크에서는 제2의 도시 모술을 일주일 만에 점령하며 순식간에 수도 바그다드 코앞까지 진격하는 기염을 토했다. 2014년 6월 29일,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는 시리아의 라카 시에서 칼리프 자리에 오르며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공식적인 건국을 선포했다. 영국보다 거대한 영토와 천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을 가지고서 말이다. 시리아 북동부 반군 점령지를 전부 빼앗거나 흡수한 IS는 북으로는 쿠르드족을 공격했고, 서로는 반군과 정부군을 가리지 않고 싸움을 벌였다. IS는 시리아 내전에 개입한 외세인 서방은 물론이고 이란과 러시아, 튀르키예 역시 악의 세력으로 규정했다. 온 세상을 적으로 돌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미국과 서방 세력은 IS를 새로운 위협으로 여기면서 박멸하고자 했다. 이들은 시리아 북부의 쿠르드족을 IS와의 싸움에서 함께할 동반자로 정했다. 서방 국가들은 IS를 상대로 대규모 공습 작전을 시작했고, 동시에 쿠르드인들에게 막대한 물자를 제공하고 소규모 병력도 파견하며 지원했다. IS의 공격으로 위기에 몰린 쿠르드족은 서방 덕분에 기사회생, 침략자들을 몰아냈다. 그 후 쿠르드 민병대원들은 자신들에 친화적인 일부 반군 조직들과 손을 잡고서 시리아 민주군(SDF)을 창설했다. SDF는 IS와 적극적으로 싸우는 한편, 서방의 지지를 유지하고 시리아에서 많은 영토를 확보해서 향후 쿠르드 자치나 독립을 둔 협상에서 우위를 점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SDF는 남쪽으로 진군하면서 자연스럽게 IS의 점령지를 잠식해나갔다. 내전이 장기화되고 격화될 것으로 보이자, 2014년부터 국외로의 대대적인 탈출이 일어났다. 레바논과 요르단 같은 중동의 인접국들, 혹은 튀르키예와 그 너머 유럽으로 백만 명 단위로 난민이 발생했다. 국제 난민의 행렬은 2019년 경까지 600만 명까지 늘어나고, 유럽의 정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될 운명이었다. 난민 유입을 감당하지 못한 국가들에서 반이민 포퓰리스트 정당들이 인기를 끌게 된 것이다. 2015년은 아사드 정권에게 최악의 한 해가 되었다. 먼저 북서부 이들리브 지역에서 알누스라 전선과 연합 반란군 세력들이 대규모 공세를 감행했다. 이들리브 시를 확보하고 있던 정부군은 알누스라 전선의 대공격에 참패를 겪으며 패주했다. 이 공격으로 아사드의 지지 기반이던 서부 해안가 지역마저 위기에 노출되었다. 동부의 IS는 2015년 이라크 전선에서는 고전하기 시작했으나, 시리아의 경우 중부의 광활한 사막 지대를 거침없이 가로질렀다. 2015년 중순이 되자 IS는 다마스쿠스에서 불과 50km 거리인 곳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비록 상당수가 사막 지대였지만, 시리아 전체 면적의 50%가 IS의 점령지로 전락했다. 아사드 정권이 사면초가 상황에 놓이자, 그를 지지하던 러시아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아사드는 중동에서 유일하게 러시아와 동맹 관계였고, 시리아에는 러시아 유일의 해군 기지가 있었다. 아사드 정권의 몰락은 중동에서 러시아의 입지를 약화시킬게 뻔했다. 여기에 시리아 내전은 체첸 등에서 성전을 찾아 건너온 러시아 내부 무슬림 반란군들을 시리아 땅에서 섬멸할 기회기도 했다. 2015년 9월 30일, 그동안 물적, 외교적 지원만 보내던 러시아는 본격적으로 시리아 내전에 개입했다. 수천 명에 달하는 병력이 파견되었고, 강력한 공군이 주로 반군 점령지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공습을 감행했다. 패전 위기에 몰렸다는 평가를 받던 아사드는 강력한 우방의 참전으로 기사회생했다. 러시아의 공습 작전은 수많은 국민들이 추가로 시리아를 탈출해 반군을 지지하던 튀르키예와 유럽으로 도피하도록 유도했다. 이는 해당 국가들에 부담을 안기면서 시리아 내부 반-아사드 국민들을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냉정하지만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한편 2016년이 되자, IS의 전쟁 기계는 슬슬 이라크 방면의 전선은 갈수록 수세에 몰리고, 시리아 전선마저 교착 상태에 빠지는 상황에 처했다. 국제적으로 완벽히 고립된 무장 단체에게 양면 전선은 감당하기 힘든 싸움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쿠르드족의 SDF는 지속적으로 남진했고, 서방은 대대적인 공습으로 이를 보조했다. IS의 폭정에 질린 민간인들은 이 패거리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지 않았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베테랑들의 소진이었다. 초기 IS의 성공을 가능케 했던 정예병들은 몇 년 간의 처참한 소모전 도중 상당수가 전사하거나 전투 불능의 상태가 되었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실전 경험이 부족한 신규 보충 병력이었다. 기존에 장비의 열세를 극복할 수 있던 기반인 병사들의 질적 수준이 점차 하락하자, IS군의 전쟁 수행 능력 역시 거듭해서 저하되었다. 이때 시리아 내전의 향방을 언짢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나라가 있었다. 튀르키예는 반군의 가장 열정적인 지지자 중 하나로써 러시아의 개입으로 전황이 역전된 것을 두고 고심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SDF였다. 튀르키예는 1980년대부터 자국의 쿠르드족의 반란에 시달렸다. 문제는 튀르키예 내부 쿠르드 반란 세력이 SDF와 연합을 형성했고, 이들은 자유자재로 시리아 국경을 넘나들고 있었다. SDF의 성공은 튀르키예 내부 쿠르드인들을 자극해 반란을 키우고, 이들 반군 조직에게 거처를 제공할 위험이 있었다. 튀르키예 에르도안 정부는 반군 지원을 계속하면서도, 시리아 내 자국의 최우선 목표를 쿠르드 위협 해소로 바꿨다. 러시아가 뛰어든지 약 1년 후, 튀르키예 또한 군대를 파견했다. 튀르키예군은 FSA 조직들과 연계해서 IS 점령지를 확보했다. 하지만 이 작전의 진정한 목적은 시리아 국경 전체가 SDF에게 넘어가는 것을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2016년 하반기, 내전 전체의 승패를 가릴 혈투가 벌어졌다. 북부의 알레포 시는 전쟁 전 시리아 최대의 도시로, 개전 이후 정부군이 서부를, 반군이 동부를 장악한 채 둘로 갈라졌다. 양쪽은 산발적으로 전투를 벌였으나, 어느 한쪽도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알레포가 두 세력 중 한 곳에 완전히 넘어가는 것은 전략적으로 중요할 뿐 아니라 매우 큰 상징성이 있었다. 시리아 정부군과 그 동맹들은 2016년 중순부터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고, 치열한 혈투 끝에 알레포 시 내부 반군의 보급선을 끊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알 누스라 전선이 이끄는 반군 연합 부대가 자폭 트럭과 전차 부대를 동원해가며 반격을 개시해 기적적으로 새로운 보급선을 구축시켰다. 허나 반군 연합의 고질적 문제인 분열이 결국 발목을 잡았다. 여러 반군 조직들이 알누스라 전선의 지도를 거부하며 비협조적으로 나왔고, 같이 싸우던 일부 단체들은 알레포를 버리면서 튀르키예군의 군사작전에 합류했다. 아사드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또다시 알레포를 고립시키기 위해 공격에 나섰다. 치열한 혈전 끝에 정부군은 마침내 다시 한번 보급선을 끊으면서 알레포를 포위했다. 새로운 보급로를 만들려는 알누스라 전선의 최후의 공세도 끝내 실패로 돌아갔고, 알레포 동부에 남겨진 반군과 민간인들은 저항을 이어가다가 튀르키예와 러시아 간의 협상 끝에 항복했다. 항복한 병사들과 민간인들은 거취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고, 알레포는 결국 4년 반 만에 아사드 정권 수중에 온전히 돌아왔다. 불과 1년 반 전까지만 해도 최대 위기에 몰려있던 시리아 정부는 승기를 잡았다. 2017년은 내전 발발 이후 아사드 정권에게 최고의 한 해였다. 상술된 원인들로 갈수록 전투 능력이 저하된 IS는 사방팔방에서 붕괴했다. 서방의 더욱 강해진 지원을 받던 SDF는 계속해서 남진하며 수도 라카를 포위했다. 시리아 정부군과 그 동맹들 역시 본격적인 영토 탈환에 나섰다. 2015년부터 반격에 나선 이라크군은 사실상 전국토 수복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IS는 중과부적의 형세를 극복할 능력이 없었다. 그들은 2017년 한 해 동안 이라크에서는 사실상 완전히 박멸되었다. 시리아에서도 정부군과 SDF, 반군의 합동 공격 끝에 점령지를 거의 상실한 채 광활한 사막의 일부 지역을 누빌 뿐이었다. 지도자 알 바그다디는 소수의 측근들과 함께 어딘가로 숨어들었다 훗날 트럼프 정권에 의해 사살된다. 한 때 세계를 공포에 빠뜨렸던 지하디스트 집단은 이제 도적떼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다. 2024년 11월 27일, HTS는 일부 SNA 조직들과 힘을 합쳐 알레포 탈환을 목표로 한 제한적 공격을 개시했다. 시리아의 전선은 4년 반 만에 다시 한번 요동치게 되었다. 드론과 택티컬 장갑차 같은 장비로 무장한 반군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공격했다. 외세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부패로 점철되어 있던 정부군은 여기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병사들은 윗선의 지시를 거부한 채 전장에서 그대로 달아나거나 항복했다. 기습 공격에 성공한 반군은 29일이 되자 마침내 다시 알레포 시내로 진입했다. 알레포는 그로부터 겨우 사흘 만에, 별다른 저항 없이 완전히 함락되었다. 4년 반 동안 치열한 혈전이 이뤄지고, 시리아 정부가 승기를 잡은 바로 그 도시가 불과 사흘 만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HTS는 급히 주민들에게 식량을 배급하고 전기와 수돗물을 복구하면서 민심 잡기에 나섰다. 어이 없는 승리를 거둔 HTS는 그대로 대대적인 공격을 이어갔다. 자신의 적이 얼마나 약한지 깨달은 줄라니는 목표를 다마스쿠스로 바꿨다. 아사드군은 그 어디에서도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못했다. 또다른 대도시 하마에서 그나마 며칠을 버텼지만 결국 패주하고 말았다. 반군은 농촌 지역도 휩쓸면서 무시무시한 기세를 보였다. 일부 아사드군 병사들은 자신들을 지휘하려는 이란인들에게 총기를 난사하면서 투항했다. 아사드가 위기에 빠지자 그와 화해 협정을 맺은 반군 대원들도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남부의 다라 지역은 이미 그 전부터 아사드에 불만을 품은 일부 대원들이 게릴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조직들은 1년 전부터 북부의 HTS와 비밀리에 접선해서 작전 계획을 세웠고, 때가 되자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켰다. 다마스쿠스에서도 그 전에 항복을 했던 반군 조직들이 재결성되며 아사드를 겨냥했다. 자신의 왕국이 순식간에 망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사드는 마지막까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다. 그는 각료들에게 군사적 대응 관련 지시를 내리지 않았고, 총리에게 행정 개혁 논의나 하자고 제의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보였다. 반란군이 사방팔방에서 대통령궁으로 진군하던 12월 8일, 그는 마침내 가족들과 함께 막대한 돈을 챙기고서는 비밀리에 모스크바로 향하는 비행기에 탔다. 그의 최측근들마저 이 사실을 몰랐다. 아사드가 모스크바로 도주하자마자, 다마스쿠스에서 일어난 반란군은 대통령궁에 들이닥쳤다. 아사드 정권의 마지막 총리는 이들에게 정권 이양 관련 협조를 약속했다. 머지않아 HTS의 지도자 아부 무함마드 줄라니가 다마스쿠스에 도착했고, 다마스쿠스 시민들은 그를 열광적으로 반겼다. 아사드에 반대하던 국민들은 전부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전국 각지에 남아있던 아사드 잔당들도 대다수가 그대로 항복하거나 망명을 갔다. 장장 14년간 이어지며 60만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시리아 내전은 그렇게 아사드의 허망한 패배로 마무리 되었다. 내전 종식 이후 시리아에는 줄라니를 대통령으로 삼는 새로운 임시 정부가 들어섰다. 줄라니는 자신의 본명 아흐메드 알사랴를 공식 석상에서 쓰기 시작하면서 지하디스트 이미지를 벗기 위해 노력했다. 샤라는 여러 반군 조직들을 통합해 신 시리아군을 창설했고, 곧바로 또다른 내전이 일어나는 최악의 불상사를 막았다. 시리아 내전의 종전은 국제 정세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시리아 정부의 최대 동맹인 러시아는 아사드 정권의 몰락으로 인해 중동 최우방을 단숨에 손실했고, 국제적 위상 역시 약화되었다. 그나마 현재는 시리아 신정부가 러시아의 군사기지를 유지 중이지만, 샤라의 마음이 언제 바뀔지는 모른다. 이란과 헤즈볼라도 막대한 손실을 봤다. 이란은 아사드를 지키기 위해서 시리아 내전에 엄청난 양의 돈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이 투자는 결국 아사드가 무너지면서 그대로 허공으로 들어갔고, 이란인들은 자국 정부의 외교 정책에 회의감을 느꼈다. 반면 마지막까지 반군을 지지하던 튀르키예는 내전의 최대 승자로 꼽힌다. 샤라 대통령은 집권 이후 해외 정상들 중 튀르키예 에르도안 대통령을 제일 먼저 만나며 감사를 전했다. 튀르키예 기업들은 시리아 경제 재건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큰 이익을 낼 것이다. 한편 유럽 정치 지형을 뒤흔든 시리아 난민 사태에도 해결책이 보인다.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이 무너지고 안정화되면서, 세계 곳곳의 시리아인들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다. 시리아 정부 역시 국가 재건을 위해서 국민들의 귀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시리아 내전의 종결은 우리나라에게도 뜻밖의 성과를 가져왔다. 작년 2월 쿠바와 수교가 이뤄진 후, 이 세상에 남한 대신 북한만을 정식 국가로 인정한 나라는 오랜 우방인 아사드의 시리아 밖에 없었다. 그러다 시리아 신정부가 마침내 한국과 수교하면서, 지구상 최후의 북한 단독 수교국도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시리아 내전 종전 1주년인 현재, 시리아의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쿠르드족의 처우 관련이다. 아사드 정권 최후의 날들 당시 SDF는 튀르키예의 사주를 받은 SNA와 교전을 벌였다. 임시 휴전이 성사되었으나, 근본적인 문제점은 사라지지 않았다. 시리아 신정부와 튀르키예는 근본적으로 중앙 집권 국가를 추구하면서 SDF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압박하고 있으나, SDF는 폭넓은 자치를 요구하며 반발하고 있다. 튀르키예의 압박이 심해지면서 북동부 시리아에는 실시간으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중이다. 남부에서는 이스라엘도 침략을 개시했다. 아사드의 몰락 직후, 이스라엘은 여러 군사 시설에 무차별 폭격을 가한 다음 시리아 남부 일부 지역을 불법으로 점령했다. 설상가상으로 이스라엘은 남부 드루즈교도들 중 일부 극단적인 분파를 지지하면서 이들의 분리주의 반란을 유도하고 있다. 동부 사막 지대의 IS도 잠재적 위협을 행사한다. IS는 아사드 정권 말기부터 절망한 청년들을 유혹하면서 사막을 활보하고 다녔다. 시리아 신정부가 들어서자 이들은 잠시 억눌렸으나, 머지않아 활동을 재개하며 계속해서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특히 SDF 영토에 여러 IS 포로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이 혼란을 틈타 탈옥할 경우 IS의 부활에 힘이 실릴 수 있다. 아사드 정권의 코어였던 알라위파도 극심한 문제다. 아사드 정권 패망 후에도 일부 잔당들은 알라위파가 거주하는 서부를 중심으로 소규모 게릴라전을 수행하는 중이다. 이들의 화력이 절정에 달했던 2025년 3월, 진압하러 온 신정부군 병사들은 여러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사태는 겨우 통제 하에 놓였고, 학살범들은 재판을 받게 되었으나, 이 사건은 시리아 신정부의 이슬람주의적 위험성을 공개적으로 홍보하며 여러 알리위파를 불안에 빠뜨렸다. 전직 아사드 정권 인사들은 이런 불안 정서를 이용해서 반란을 선동하고 있다. 더군다나 시리아 신정부는 새로운 군대를 만드는 과정에서 기존 정부의 병사들을 전원 강제 전역시켰다. 이들이 새롭게 일자리를 찾지 못할 경우, 아사드 정권 측근들에 선동되어 또다른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노릇이다. 신정부가 얼마나 민주적이고 자유주의적으로 운영될지도 미지수다. 샤라가 이들리브에서 보여준 통치술은 나름 온건하고 자유를 보장했으나, 결국 근본적으로 독재정에 불과해 그 한계가 명확했다. 취임 이후 그는 아직 완전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힘들기에 당분간은 점전직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상술한 학살 사태를 거론하며 샤라가 언젠가는 이슬람주의 독재자라는 본색을 드러낼 것이라는 비관론도 있다. 끝으로 시리아의 재건은 아직 갈 길이 멀다. 14년 간의 내전으로 쑥대밭이 된 나라가 다시 정상 궤도로 들어서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아직은 아사드의 몰락으로 환희에 찬 국민들이 더 많지만, 경제 회복과 국가 재건이 지지부진해진다면 점차 신정부에 실망할 것이다. 이 모든 위태로운 지점들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리아의 미래를 희망차게 볼 부분도 분명 있다. 샤라는 현재까지 여전히 이들리브에서 보였던 온건 노선을 유지하고 있다. 술집은 여전히 운영 중이고 히잡 착용은 강제가 아니다. 소수 종교 신자들도 적잖은 수가 신정부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 샤라는 놀라울 정도의 외교 수완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 빈 살만 왕세자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고, 빈 살만과 에르도안의 도움으로 집권 5달 만에 트럼프와의 깜짝 회담을 이룩했다. 샤라는 트럼프와 짧은 시간 동안 대화 했으나, 그 안에 트럼프를 매료시키는데 성공했다. 곧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트럼프는 회담 이후 며칠 뒤 아사드의 시리아에 부과된 경제 제재를 전부 해제시키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미국 내부에서 샤라의 알카에다 이력과 인권 탄압 우려, 그리고 이스라엘의 강력한 요구 때문에 있던 제재 해제 반대 움직임을 무시한 채 독단적으로 나온 결정이었다. 시리라인들은 자유로운 경제 활동이 가능해졌다는 소식에 다시 한번 거리로 나와 축하했다. 트럼프는 이후 샤라를 백악관으로 공식적으로 초청했다. 샤라는 트럼프와 뜻 깊은 대화를 나눴고, 트럼프는 그를 칭송하면서 이스라엘과의 분쟁에서 사실상 시리아의 편을 들며 이스라엘을 강하게 압박했다. 미국 대통령이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의 편에서 후자를 지지한 것은 사실상 처음이었다. 국가 재건도 서서히 진행되고 있다. 전국에 점차 전력과 수도가 복구되고 있고, 학교도 새롭게 열리고 있다. 제재 해제 이후 카타르와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수십억 달러의 원조와 투자를 약속했고, 이것이 곧 실현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다. 무엇보다 대다수 시리아인들은 아사드를 몰아냈다는 사실에 아직 행복해 할 여유는 있는 듯 하다. 21세기 최악의 전쟁의 종전 이후, 시리아는 아슬아슬한 길을 걷고 있다. 이 길은 언제든지 내부 분열이나 외세의 개입으로 망가질 위험이 있는 길이다. 실제로 이미 안 좋은 일들이 계속해서 시리아를 괴롭히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국제 사회의 도움으로 시리아가 마침내 상처를 치유하고 새 출발을 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새로운 시리아는 과연 전쟁으로 시달린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시간만이 알려줄 것이다. 참고 자료 이슬람 전사의 탄생 - 정의길 중동은 왜 싸우는가? - 박정욱 위키백과 "An Army in all Corners": Assad's Campaign Strategy in Syria “Local reconciliation agreements” in Syria: a non-starter for peacebuilding https://understandingwar.org/research/middle-east/turkey-commits-to-idlib/ https://www.britannica.com/event/Syrian-Civil-War/Civil-war https://www.bbc.com/news/world-middle-east-38132163 https://www.middleeasteye.net/news/how-syrian-mutinies-and-betrayal-sunk-irans-support-assad https://warontherocks.com/2024/12/the-patient-efforts-behind-hayat-tahrir-al-shams-success-in-aleppo/ https://engelsbergideas.com/notebook/syria-surprise/ https://www.reuters.com/world/middle-east/demoralised-abandoned-by-allies-why-assads-army-failed-fight-syria-2024-12-12/ https://fpif.org/the-turkish-role-in-assads-downfall/ https://www.mei.edu/publications/crossroads-idlib-hts-navigating-internal-divisions-amid-popular-discontent https://www.cfr.org/interview/understanding-battle-aleppo https://thisisbeirut.com.lb/articles/1312401/hts-from-a-war-economy-to-a-fully-functioning-state https://carnegieendowment.org/research/2022/03/border-nation-the-reshaping-of-the-syrian-turkish-borderlands?lang=en https://foreignpolicy.com/2024/12/05/syria-assad-regime-collapsing-quickly/ https://foreignpolicy.com/2024/05/30/the-normalizing-of-assad-has-been-a-disaster/ https://www.economist.com/leaders/2025/12/04/syrias-transition-has-gone-better-than-expected https://www.dw.com/en/one-year-after-assads-fall-what-has-syria-achieved/a-74895004
작성자 : 라파헤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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