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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를 배경으로 만든 전설적인 일본노래..JPG
문학적이고 은유적인 가사, 독특하고 개성 강한 보컬, 뛰어난 무대연출력으로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 초반에 일본 여성 가수의 붐을 일으켰던 일본을 대표하는 싱어송라이터 '시이나 링고'의 첫 정규 앨범 '무죄 모라토리엄(無罪モラトリアム, 1999)' 3번 트랙 <마루노우치 새디스틱> 시이나 링고가 데뷔하기전 18살에 썼던 곡으로 당시 일본은 버블 붕괴로 인한 경기 불황 시절이었고. 그 시절 도쿄를 음악으로 표현했다. 이 곡을 처음 알게된 사람들은 발매년도가 1999년인 것에 꽤나 놀라는 편이다. 20년도 더 전에 출시된 곡이지만 지금 들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세련되고 강렬한 멜로디가 매력적이기 때문. 특이한 점으로 패션은 다이쇼 로망 오마주가 많은데 일본의 전통 복장과 판화 우키요에 그리고 욱일기를 이용해 시각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준다. 참고로 시이나 링고는 원래 2020 도쿄 올림픽 개폐막식 연출팀 멤버중 한명으로 선택 되었는데, 개최가 연기되고 유치 대행사와의 문제로인해 초기 연출팀은 해체되며 하차를 했다. (폐기된) 기존팀이 만들었던 개회식 상세 초기안을 살펴보면 아키라의 바이크씬이 등장할 예정이었고, 이후 종목 소개에선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 IP들이 사용될 예정이었다. IOC 측에서도 매우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시이나 링고가 포함된 기존팀이 그대로 진행했다면 2012 런던올림픽처럼 일본색깔을 살린 역대급 개회식이 되었을지도.. - dc official App
작성자 : 이시라고정닉
다단계 때문에 내전이 일어난 나라가 있다?
1992년, 막 독립한 알바니아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알바니아는 유럽에서 가장 가난하고 고립된 국가였으며, 국민의 대다수는 물론이고 정부의 관료들마저도 시장경제 체제를 알지도, 경험해보지도 못한 채 급격한 체제 전환을 맞닥뜨렸다. 1992년 알바니아의 1인당 GDP는 약 200달러로, 오늘날 가치로 계산하면 알바니아는 브룬디보다도 못한 경제 상황에 처해있던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알바니아의 초대 대통령으로 부임한 이가 바로 살리 베리샤였다. 그는원래 심장외과의로, 폐쇄적인 알바니아에서 파리 유학을 다녀오고, 서유럽 의학계에서도 인정받는 등 실력있는 자였다. 그는 알바니아 정계에 사상과 표현의 자유, 여행의 자유를 요구했으며, 1990년 12월 알바니아 역사상 최초로 야당을 창당하여 알바니아의 민주화를 이끌었다. 베리샤는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성공적인 정권 교체에 성공했으며, 의원내각제인 알바니아에서 총리직을 사양하고 대통령직을 선택했다. 물론 당대 베리샤의 권위가 매우 드높았기 때문에 이 시기 알바니아의 정치는 의원내각제라기 보다는 대통령중심제에 더 가까웠다. 이는 이후 일어난 사건에 베리샤의 책임을 더 묻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상술했듯이 알바니아의 국민 대다수는 시장경제를 경험해보지 못했었다. 심지어 대통령인 베리샤도 시장경제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알바니아에는 민간 은행은 거의 없었으며, 3개의 국영 은행이 예금의 90%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 3개의 국영 은행만으로는 시장경제를 굴러가게 할 신용수요를 충분히 공급할 수 없었다. 때문에 비공식 신용 시장이 성횡하기 시작한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문제는 이를 규제할 어떤 법적 제도나 안정 장치가 전무했다는 사실이다. 예금 투자 회사들은 30%에서 100%에 이르는 금리를 제시하며 투자자들을 유혹했다. 이 회사들은 높은 수익률을 보이며 사람들을 끌어 들였고, 그렇게 해서 돈이 모이면 이를 초기 투자자들에게 배분했다. 즉, 전형적인 피라미드 사기, 다단계였다. 그러나 알바니아 사람들은 다단계가 뭔지도 몰랐다. 사기꾼들은 금융 문맹이었던 사람들, 그저 자유화된 나라에서 미국과 서유럽 사람들처럼 잘 먹고 잘 살고 싶어했던 알바니아 사람들의 열망을 이용했다.
베파(Vefa), 걀리차(Gjallica), 캄베리(Kamberi) 같은 회사들이 우호죽순 생겨났으며, 어떠한 감시와 규제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일부 정상적인 회사마저도 다단계 회사로 변질되었다.거대한 규모의 피라미드 사기는 겉보기에 달콤해보였다. 높은 수익률과 배당에 정부의 관료들과 은행가들도 속아 넘어가거나 이를 방조했다. 알바니아의 경제성장률은 93년 9.6%, 94년 8.3%, 95년 13.5%를 기록하며 경제는 기록적인 성장을 보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화양연화는 95년 뜻밖의 유엔결의안으로 금이 가기 시작한다. 1992년 5월에 보스니아 전쟁으로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부과된 유엔 제재는 데이턴 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1995년 11월 종식된다. 그동안 제재를 회피한 석유 밀수로 상당한 수입을 얻고 있었던 알바니아의 다단계 회사들은 큰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었다. 또한 1996년 알바니아 총선이 오자 많은 다단계 회사들이 공격적인 투자자 확보 경쟁에 들어가게 되었다. 샤페리(Xhafferi)는 3개월 안에 원금의 세 배를 돌려준다고 했고, 수데(Sude)는 2개월 안에 두 배를 벌게 해준다고 광고했다. 알바니아 사람들은 이에 혹해 집과 차를 팔고, 가축을 팔아 회사에 투자를 했다. 인구가 350만인 알바니아에 샤페리와 포풀리(Populli), 이 두 회사는 약 200만 명의 예금자를 유치했다. 1996년 11월, 알바니아 다단계 회사들의 부채 수준은 총 12억 달러에 달했고, 베파 하나의 부채 규모만 알바니아의 총 GDP의 5%에 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를 우려하는 이는 적어도 알바니아 안에서는 없었다. 1996년 10월 전까지 알바니아 중앙은행과 재무부는 이에 대해 어떤 경고나 권고도 하지 않았으며, 알바니아 외부에서 IMF와 세계은행의 지속되는 경고에도 베리샤 대통령은 외부기관이 알바니아의 기업을 억압한다며 다단계 회사들을 옹호했다. 96년 2월부터 알바니아 중앙은행은 은행법에 따라 불법 예금 취급 기관을 폐쇄할 권한이 있었지만 정부의 옹호 때문에 다단계 회사들에게 행사되지 않았다. 그리고 1996년 11월 17일, 수데가 채무 불이행을 하면서 재앙이 시작되었다. 1997년 1월 16일까지 알바니아의 다단계 회사 25개가 파산하면서 알바니아 GDP의 절반 수준인 12억 달러가 증발했다. 알바니아 국민의 약 20%에서 많게는 60%가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1997년 1월, 알바니아 남부부터 소요 사태가 발생한다. 2월 28일에는 알바니아 국가정보국 지부가 공격당해 불에 타버리고, 3월 1일에는 남부 블로러에 있는 파샤 리만 해군 기지가 장악당했다. 또다른 남부도시 사란더(Saranda)에서도 군함 6척이 나포되자 알바니아 공군이 시위대를 두 차례 공습하기도 했으며, 3월 4일 두 명의 조종사가 공습을 거부하고 이탈리아로 망명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블로러에는 독자적인 정부 역할을 하는 '국가구원위원회(National Salvation Committees)'가 생겨나고 아예 독립까지 건의하기까지 이른다. 알바니아 남부와 북부의 충돌이 격화될 조짐이 보이자 3월 미국은 실버 웨이크 작전을, 독일은 리벨 작전을 통해 자국민과 외국인들을 대피시켰다. 많은 알바니아인이 또한 내전을 피해 국외로 도피했다. 많은 알바니아인이 인접국인 이탈리아로 도피했고, 여론이 악화되자 이탈리아 해군은 백기 작전(Operation White Flag)을 통해 알바니아 난민 유입을 막고자 하였다. 이 와중에 3월 28일, 이탈리아 해군의 미네르바급 초계함 시빌라 함이 142명이 타고 있었던 카테리 이 라데스(Kateri i Radës) 호와 충돌하며 83명이 사망한 오트란트의 비극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내전은 1997년 8월까지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2000명이 사망했으며 3700명에서 5000명이 부상을 입었다. 유엔개발계획(UNDP)에 따르면 탄약 15억 발, 각종 무기 65만 정, 수류탄 350만 개, 지뢰 100만 개가 약탈 당했다. 내전 동안 알바니아 국가정보국(SHIK) 요원들은 화형 당하고 잔혹하게 살해당했으며, 7개의 교도소가 습격당해 파괴되었다. 알바니아 지방법원 36개 중 15개도 파괴당했다. 대다수 경찰들은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지 못했고, 3월과 4월에만 경찰 30여 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 알바니아의 경제성장률은 97년 -11.7%를 찍었으며, 피해액은 2억 달러, 96년 알바니아 GDP의 약 16% 수준이었다. 알바니아의 내전이 종식될 수 있었던 것은 내전의 원인이 종교, 민족, 영토의 갈등이 아닌 단지 경제적인 이유였다는 것과, 국제사회의 지원, 그리고 빠른 정치 안정화 덕분이었다. 알바니아 조기 총선은 1997년 6월 29일에 이뤄졌다. 결과는 여당의 참혹한 패배였다. 알바니아 공산당의 후신인 사회당이 전체 의석 155석 중 100석을 가져가며 선거에서 압승했으며, 여당인 민주당은 고작 27석만 확보하며 대패했다. 살리 베리샤는 그와중에 자기 직을 걸고 야당이 선거에서 승리하면 사임한다고 도박을 걸었다가 당연히 쫓겨나고 말았다. 다행히 알바니아의 혼란은 빠르게 수습되었다. 8월 모든 알바니아 내 다국적군은 철수했다. 알바니아의 성장률은 98년 다시 8.3%를 찍었다. 6월 29일 총선과 함께 진행된 군주제 국민투표 논란과 더불어, 9월 알바니아 의회에서 사회당 의원이 민주당 의원에게 총을 4번이나 쏘는 일이 있기도 했지만(민주당 의원은 살음) 알바니아 정치는 그럭저럭 진정됐다. 그러나 알바니아 정부는 이 사태의 원인이었던 다단계 회사들을 98년 3월까지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했다. 많은 사기꾼들이 국외로 도망갔고, 여전히 알바니아에 머물고 있던 바보들만 체포할 수 있었다. 베리샤는 선거 참패 이후에도 민주당 당대표 직을 97년부터 2005년까지 유지했으며, 2005년부터 2013년까지는 알바니아 총리까지 다시 지낼 수 있었다. 알바니아의 다단계 사기로 대표되는 인물은 하즈딘 세이디야인데, 이 사람이 바로 처음으로 다단계 사기를 시작한 인물이다. 그는 97년 이후로 수 백만 달러를 들고 스위스로 도망 갔었고, 거기서도 비슷한 다단계 사기를 치고 다니다 체포돼 7년 동안 복역을 했다. 이후 그는 2004년 알바니아에 돌아왔고 최소 5개의 회사를 굴리며 공공계약을 따내기도 했다. 그는 2013년 4월 14일 가짜 신분으로 코소보에 출국하려다가 걸려서 체포 당했다. 재밌는 사실은 그가 금융 사기로 인터폴에 수배된 상태라 가짜 신분을 써야했다는 사실인데, 그를 수배한 나라가 알바니아도 아니고 아랍에미리트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6월 10일 알바니아 지방법원은 UAE가 하즈딘을 소환하려는 서류를 보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석방시키고 말았다.2015년 10월 알바니아 경찰은 하즈딘을 사기와 돈세탁 혐의로 다시 고발했는데, 이때도 하즈딘은 알바니아에서 여러 사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즈딘과 베리샤는 지금도 잘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출처]https://1997-2001.state.gov/global/human_rights/1997_hrp_report/알바니아.htmlhttps://www.imf.org/external/pubs/ft/fandd/2000/03/jarvis.htmhttps://hrcak.srce.hr/file/262691https://gazeta-shqip.com/aktualiteti/gjykata-e-kukesit-pushon-ceshtjen-per-biznesmenin-hajdin-sejdia/ Just a moment... Just a moment...gazeta-shqip.comhttps://shqiptarja.com/lajm/saga-e-pa-njohur-nbsp-e-hajdin-sejdis-euml-br-prapaskenat-quot-iliria-holding-qeveri-quot
작성자 : 도만고정닉
아편전쟁에서 중국군이 패한 과정...JPG
..서양의 군함과 대포 앞에 무력한 모습을 보이던 군대를 개선하기 위한 또 다른 방책은 도가의 신비한 방술이나 사찰의 권법을 채용하는 것이었다.예를 들어 무술의 고수들이 물속에서 호흡하지 않고 10시간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있다고 장담하자 이들을 고용해 강물 속에 들어가 영국 전함의 바닥에 구멍을 뚫으려 하기도 했다.(중략)...이렇게 해서 이처럼 나라가 위급한 순간에 경전 연구를 중단하고 몰려든 열정적이지만 미숙한 젊은 서생들로 구성된 대규모 참모진이 구성되었는데, 장교들은 모두 앞다투어 자기 관품에 해당하는 호위병과 보조금 등을 요구했다. 따라서 지휘 계통이 분명히 서지 못했으며, 특히 여러 성에서 파견된 정규군들이 다른 지휘관의 명령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그러나 멋진 깃발, 수를 놓아 장식한 전투복, 번쩍거리는 무기 뒤에 가려 군 내부에 존재하는 이러한 분열은 간과되었다. 이들 서생들은 군 진영 내에서 여러 차례 다회와 연회, 그리고 시사문회 등을 개최하는 등 활기에 차 있었다. 실제 전투에 들어가기 한 달 전에 한 유명한 화가가 강렬한 색채의 아름다운 북송 원체화법으로 전투에서 승리하는 장면을 묘사하기도 했다. 심지어 총사령관 혁경 자신이 한 차례 글짓기 대회를 개최해어느 글이 앞으로 있을 승리를 선포하는 포고문으로 가장 잘 쓰였는지를 결정하느라고 며칠간을 바쁘게 보내기도 했다. 마침내 그는 교전 상황과 각각의 지휘관들이 어떻게 명령을 하달하고 전공을 표창하는지를 가상으로 그린 작품을 하나 골랐다.도광제의 사촌(혁경)이 전투를 언제 개시하는 것이 가장 좋을지를 놓고 어느 정도 고민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그가 어느 하루 항저우의 한 사당에서 길일을 점치는 것으로 간단히 해결되었다. 그는 '호랑이' 점괘를 뽑았다.이를 근거로 공격 시간은 정확히 호랑이에게 길한 임인년 인월 인일 인시, 즉 1842년 3월 10일 새벽 3~5시 사이로 정해졌다.그런데 이떄는 공교롭게도 비가 많이 오는 봄철이었다. 그리하여 군사들은 발이 푹푹 빠지는 길을 힘겹게 걸어와 바퀴 자국들로 어지러운 진창투성이 진지에 투입되어야 했으며, 더욱이 전투 전날 밤까지도 도로 사정 때문에 군수물자가 제대로 조달되지 못해 대부분이 여러 날 굶은 상태였다. 거의 탈진 상태에다 비에 흠뻑 젖은 몸을 이끌고 주린 배를 움켜쥐며 병사들은 공격을 준비했다.공격은 세 방향으로 개시되었다. 원래의 전투 계획에 따르면 36000명이 닝보의 서문과 남문으로 진격하고, 15000명은 전하이를 탈취하며, 1만 명의 수군은 전함이나 어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 저우산을 재탈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 병력의 60%가 참모본부의 호위병으로 파견되었고, 혁경은 술 생산지로 유명한 사오싱에 있는 사령부 주위에 개인 병력 3000명을 주둔시켜놓고 있었다.나머지 지원 부대는 혁경의 참모장의 지휘 아래 닝보와 전하이를 잇는 교량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리하여 실제로는 대략 4000명의 병사만이 공격에 나섰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마저도 아무도 선봉에 서려고 하지 않았다.이처럼 모두가 머뭇거리고 있는 바람에 닝보 공격의 선봉 역할은 700명의 쓰촨 병사들에게 돌아가고 말았다. 이들은 기습 공격의 원칙을 준수해 최후의 순간까지 총을 쏘지 말라고 명령받았지만베이징어를 거의 할 줄 몰랐던 그들의 지휘관은 이를 총을 절대 휴대해서는 안 된다는 지시로 이해했다. 이로 인해 이들 진촨 토박이들은 칼 한 자루만을 손에 들고 영국 공병대가 매설해놓은 지뢰지대와 아일랜드 병사들의 유탄포 사정거리 안으로 유유히 걸어 들어갔다. 영국군이 발포를 개시하자 다른 미숙한 청군들이 이들 쓰촨 병사들의 후방으로 달려들면서 수천 명이 서문으로 몰리는 상황이 되었고, 곧 주변 거리에는 피가 강물을 이루었다. 영국군은 겁에 질려 우왕좌왕하는 청군들을 차례차례 학살해버렸다. 이 끔찍한 대살육에 영국인들조차 구역질을 느낄 지경이었다.만일 혁경이 지원 부대까지 투입했다면 그들은 아마 이 도시를 탈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묘한 아이러니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일이지만 후방의 지원 부대를 지휘하고 있던 그의 참모장은 가마 위에서 아편을 흡연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병력도 필요한 때는 이미 아편에 취한 상태였다. 그의 군관과 병사들은 첫 번째 포성을 듣자마자 도망쳐버렸다.이렇게 되자 단지 저우산 방면의 수군만 남게 되었는데,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항구를 출발하자마자 대부분의 병사들이 뱃멀미를 했고, 지휘관은 영국 함대를 만날까 두려워 이후 20여 일 동안 연해를 따라 배를 몰고 왔다갔다하면서 정기적으로 전투 상황을 허위로 보고했다. 이리하여 아편전쟁에서 청군이 감행한 마지막 공세는 끝났고, 그와 함께 명예로운 강화를 위한 모든 가능성도 사라졌다.존 K. 페어뱅크 - 캠브리지 중국사 10권 中1. 서양유럽이 근대과학으로 무장할때중국군은 전근대적 도가사상이나 권법무술 망상 2. 중국군은 근대식 참모진의 부재로 지휘계통 난립, 보급능력 부족, 무능한 지휘로 어이짐3. 작전구상 없이 공격 날짜를 점괘 미신에 의존중국군 지휘관과 참모장은 아편 빨다가 포성 듣고 도망감4. 결과는 영국의 일방적인 중국군 대살육 ㄷㄷ중국은 이후에도 아편전쟁의 교훈을 얻지 못하고 또 의화단 전쟁으로 서방에게 일방적인 패배 학살을 당하고 만다전훈을 얻고 배워야 하는 이유 ㄷㄷ
작성자 : ㅇㅇ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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