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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한대] 신은 왜 공평하지 않은가

ㅈㅅㅋ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5.04.02 20:46:27
조회 142 추천 0 댓글 3

[띠링-]


정적을 깨는 단조로운 기계음.

귀에 딱지가 앉도록 익숙한 소리.

스마트폰 액정이 반짝였다.


강민준은 반쯤 감긴 눈으로 화면을 확인했다.

기대감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OO은행] 월급 입금 완료. 금액: 1,850,000원.


"..."


그래, 오늘은 월급날이었다.

한 달 내내 시달리고, 욕먹고, 간신히 버텨낸 대가.

하지만 화면에 찍힌 숫자는 그의 마음에 어떤 파문도 일으키지 못했다.

마치 텅 빈 호수에 던져진 작은 조약돌처럼, 그저 흔적 없이 사라질 뿐이었다.


통장 잔액: 1,345,670원.

(이전 잔액: -504,330원. 마이너스 통장의 흔적)


"하아..."


깊고 무거운 한숨이 퀴퀴한 자취방 공기 속으로 가라앉았다.

담배 쩐내와 어제 먹다 남은 컵라면 국물 냄새가 뒤섞인, 희망 없는 공간의 냄새.

창문 너머 들어오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방 안의 먼지를 더욱 도드라지게 비췄다.


월세 50만 원.

각종 공과금 약 15만 원.

휴대폰 요금 8만 원.

학자금 대출 원리금 상환 30만 원.

마이너스 통장 이자 및 일부 상환… 최소 20만 원.

교통비, 식비, 최소한의 생존 비용…


계산할 필요도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통장에서 증발해 버릴 돈이었다.

이번 달도 마이너스를 벗어나긴 글렀다.

'월급'이라는 단어는 그에게 '생명 유지 장치' 정도의 의미였다. 결코 풍요나 여유와는 거리가 멀었다.


스물다섯.

강민준.

남들처럼 번듯한 대학 졸업장도,

내세울 만한 어학 점수나 자격증도,

그렇다고 세상을 놀라게 할 특별한 재능 같은 건 더더욱 없는,

그저 그런, 아니 그 이하의 청년.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간신히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삶.

미래에 대한 희망보다는 당장의 생존이 더 급급한 현실.

그에게 허락된 유일한 위안이자 자부심은,

오직 모니터 속 네모난 세상, 가상 세계 속에 존재했다.


리그 오브 레전드 (League of Legends).

티어: 다이아몬드 1.


수천만 명이 즐기는 이 게임 속에서, 그는 상위 1% 안에 드는 실력자였다.

물론, 천상계라 불리는 마스터, 그랜드마스터, 챌린저 티어에는 명함도 못 내밀고,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프로게이머들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존재일지언정.


하지만, 적어도 이 게임 안에서만큼은, 그는 '잘하는 놈'이었다.

자신의 컨트롤과 판단으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세계.

현실의 무력감과는 정반대의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공간.


그것만이 팍팍한 현실 속에서 구겨질 대로 구겨진 민준의 자존심을,

간신히, 아주 간신히 지탱해주고 있었다.


오늘도 그는 너덜너덜해진 자존감을 충전하고,

현실의 스트레스를 잠시 잊기 위해,

익숙한 발걸음으로 동네 PC방으로 향했다.

주머니 속에는 간신히 긁어모은 만 원짜리 한 장이 전부였다.


"사장님, 3시간 선불이요."


무뚝뚝하게 돈을 내밀자, PC방 사장은 별말 없이 시간을 넣어주었다.

쾌쾌한 담배 냄새와 자극적인 라면 국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키보드를 두들기는 요란한 타건음,

마우스를 광클하는 날카로운 소리,

헤드셋 너머로 새어 나오는 온갖 게임 효과음과 흥분한 고함들.


어두컴컴하고 탁한 공기.

정신 사나운 소음의 향연.

하지만 민준은 이 혼돈스러운 소음 속에서 역설적인 안정감을 느꼈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현실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늘 앉던 구석진 자리.

벽에 기대어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조금이나마 자유로울 수 있는 곳.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부팅되는 컴퓨터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습관처럼 바탕화면의 익숙한 아이콘으로 마우스 커서를 가져가려던,

바로 그때였다.


"...어?"


민준의 시선이 PC방 입구에 고정되었다.

방금 들어선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남자의 실루엣.

실루엣만으로도 압도적인 존재감이 느껴졌다.


평범한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압도적인 키.

족히 190cm는 넘어 보였다.

그리고 그 키에 걸맞은, 태평양처럼 넓은 어깨.

다부진 체격. 운동선수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얼굴.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드러난 눈매와 전체적인 분위기만으로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TV나 인터넷 뉴스, 야구 중계에서 지겹도록, 아니 경이롭게 봐왔던 그 얼굴이었다.


"오... 오타니 쇼헤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이름.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심장이 멋대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메이저리그를 뒤흔들고 있는 야구 천재.

투수와 타자를 겸업하며 만화 같은 기록들을 써 내려가는,

살아있는 전설. '유니콘'이라 불리는 사나이.

그 오타니 쇼헤이가 왜 지금, 이 허름한 서울 변두리 PC방에 나타났단 말인가?

한국에는 무슨 일로? 경기? 광고 촬영? 아니면 단순 휴가?


눈을 비비고 다시 봤지만, 꿈이 아니었다.

분명 오타니 쇼헤이였다.

주변 사람들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헐, 저 사람 오타니 아니야?"

"미쳤다, 대박. 실화냐?"

"사진 찍어도 되나?"


몇몇은 쭈뼛거리며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밀려 했다.

하지만 오타니 옆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딱 봐도 경호원 포스를 풍기는 건장한 남자의 날카로운 눈빛에 슬그머니 휴대폰을 내렸다. 경호원은 주변을 예리하게 살피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오타니는 주변의 소란에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오히려 약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빈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더니…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민준의 바로 옆자리에 망설임 없이 앉았다.


쿵!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다시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와… 실물 미쳤다. 진짜 미쳤다.’

‘화면보다 훨씬, 훨씬 잘생겼잖아. 분위기 장난 아닌데?’


조각 같은 얼굴선. 날카로우면서도 선한 눈매.

그러면서도 어딘가 순박해 보이는 미소 (마스크 위로도 느껴지는 듯했다).

운동선수 특유의 건강하고 밝은 아우라.

같은 남자지만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신은 정말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민준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자신의 옆자리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오타니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헤드셋을 착용했다.

PC방에 널린 싸구려 헤드셋이었지만, 그가 쓰니 뭔가 달라 보였다.

그리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마우스를 움직여 바탕화면의 아이콘 하나를 더블 클릭하는 것이 아닌가.


그 아이콘은…


리그 오브 레전드.


‘…설마? 아니겠지. 잘못 본 거겠지.’

‘오타니도… 롤을 한다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망치로 얻어맞은 듯 멍했다.

저 완벽한 남자가?

야구 하나만으로도 전 세계적인 명성과 부를 거머쥔 저 남자가?

게임까지? 그것도 하필이면, 자신의 유일한 자부심이자 도피처인 리그 오브 레전드를?


이건 뭔가 잘못됐다.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민준은 최대한 티 나지 않게 고개를 살짝 돌려 오타니의 모니터를 곁눈질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지만,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그인 화면이 지나가고, 잠시 후 클라이언트 메인 화면, 소환사 정보 창이 나타났다.

선명하게 보이는 소환사명과 티어 정보.


[ShoTime_17]

[티어: 다이아몬드 1]


"......!!!"


숨을 헙, 하고 들이켰다. 입이 벌어졌다.

다이아몬드 1.

자신과 똑같은 티어였다.


아니,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LP(리그 포인트)가 자신보다 미세하게,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분명히 높았다.

그 몇 점의 차이가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와르르-.

머릿속에서 무언가 공들여 쌓아 올린 탑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의 기둥이 뿌리째 뽑혀나가는 느낌.


신은 불공평하다.

아니, 불공평한 정도가 아니었다. 이건 악의적이었다.


오타니 쇼헤이.

그는 이미 모든 것을 가졌다.

신이 내린 야구 재능. 투타 겸업이라는 만화 같은 능력.

모델 뺨치는 외모와 피지컬 (193cm의 위엄!).

건실하고 겸손하기로 소문난 인성. 논란 하나 없는 깨끗한 사생활.

그리고… 가끔씩 언론을 통해 흘러나오는 ‘그것’의 사이즈에 대한 경외심 가득한 루머까지.

(젠장, 이건 제발 사실이 아니길 바랐다. 제발!)


그런데 이제 게임 실력마저?

그것도 결코 재능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수많은 시간과 노력, 피나는 연습이 필요한 다이아몬드 1 티어를?

심지어 나보다 LP도 높다고?


‘이건 반칙이잖아! 너무한 거 아니냐고! 인간적으로!’


속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억울함, 분노, 질투, 그리고 깊은 패배감.

그래, 야구는 네가 신이다. 인정한다. 메이저리그 씹어 먹는 거 인정.

외모? 네가 압살이다. 그냥 서 있기만 해도 화보 인정.

인성? 그것도 네가 최고겠지. 미담 자판기 인정.


하지만! 게임은 다르다!

이건 손가락 싸움이고, 뇌지컬 싸움이라고!

피지컬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고!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눈이 뻘게지도록 모니터를 보고,

손목 터널 증후군과 싸워가며 쌓아 올린 나만의 성역이란 말이다!

내 유일한 자존심이자 도피처란 말이다!


이성은 이미 로그아웃한 지 오래였다.

민준의 가슴속에는 오직 하나의 강렬한 생각만이 들끓었다.


‘오타니… 저 새끼만큼은… 저 신이 내린 재수 없는 새끼만큼은!’

‘오늘 여기서 반드시, 반드시 꺾는다!’


마치 신의 농간처럼,

아니, 어쩌면 정말 신이 민준의 이글거리는 투지를 지켜보기라도 한 듯,

민준이 비장하게 ‘게임 시작’ 버튼을 누른 바로 그 순간,

매칭 완료 알림이 떴다.


[매칭 완료!]


챔피언 선택 창으로 화면이 전환되고, 아군과 적군의 닉네임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민준은 자신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듯했다.


적 팀 미드 라이너: ShoTime_17


"...진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실소가 터져 나왔다.

기가 막혔지만, 동시에 심장이 뜨거워졌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는 오타니 쇼헤이와,

게임에서, 그것도 가장 치열한 라인 중 하나인 미드 라인에서,

정면으로 맞붙게 된 것이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이런 시련이자 동시에 절호의 기회를 주시다니!’


이건 하늘이 내린 기회다.

저 완벽해 보이는 남자에게 유일한 흠집을 낼 수 있는 기회.

아니, 어쩌면 민준 자신이 유일하게 그를 이길 수 있는 무대.

야구장에서 내가 너한테 삼진 잡히고 홈런 맞을 순 있어도,

여기 소환사의 협곡에서는 다르다!


민준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를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축축하게 땀이 배어 나왔다.

자신의 모스트 챔피언이자, 수천 판을 플레이하며 손가락에 가장 익숙한 암살자,

제드를 칼같이 선택했다. 그림자 암살자.


‘오타니, 네놈의 완벽함에 오늘, 내가 균열을 내주마.’

‘야구장에서는 네가 신일지 몰라도, 여기 소환사의 협곡에서는,’

‘내가 바로 그림자 군주다!’


오타니는 잠시 고민하는 듯 마우스 커서를 몇몇 챔피언 위에서 움직이더니,

이렐리아를 선택했다. 칼날과 함께 춤추듯 전장을 누비며 상대를 베어 넘기는,

화려하지만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챔피언. 파일럿의 피지컬을 심하게 타는 챔피언.


‘이렐리아? 좋아. 피지컬로 찍어 누르겠다 이거지.’

‘어디 한번 해보자 이거지. 네 야구 피지컬이 게임에서도 통하나 보자!’


로딩 화면. 열 명의 챔피언과 소환사명이 찬란하게 빛났다.

민준은 슬쩍 옆자리의 오타니를 훔쳐봤다.

그는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손목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마치 중요한 경기를 앞둔 투수가 아니라,

동네 공원에서 캐치볼이라도 하러 나온 사람처럼 여유가 넘쳤다.

그 태연자약한 모습이 민준의 투쟁심에 기름을 부었다. 킹받았다.


"소환사의 협곡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게임 시작을 알리는 익숙한 음성.

심호흡을 크게 했다. 집중, 또 집중.


민준은 초반부터 라인을 강하게 밀어붙이며 오타니를 압박했다.

제드의 날카로운 표창(Q)이 오타니의 이렐리아를 향해 날아갔다.

몇 번은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오타니의 무빙이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몇 번은 정확히 적중하며 이렐리아의 체력을 갉아먹었다.


‘좋아, 역시 게임은 나한테 안 되는군.’

‘야구만 하던 놈이 뭘 알겠어. 섬세한 컨트롤은 내가 위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자신감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오타니는 조금도 당황한 기색 없이 침착하게 미니언을 챙겼다.

오히려 민준의 스킬 궤적을 미리 읽고 있다는 듯,

절묘한 움직임으로 피하거나 미니언 뒤에 숨어 피해를 최소화했다.

CS 수급 능력부터가 남달랐다. 저게 어떻게 나와 같은 티어지?


레벨 3. 제드에게 첫 번째 킬각이 찾아왔다. 암살자의 시간.

살아있는 그림자(W)를 전방으로 던져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힌 후,

본체와 그림자에서 동시에 날아가는 예리한 표창(Q)과 그림자 베기(E) 콤보!

거기에 점화까지!


‘잡았다!’


민준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완벽한 콤보였다. 이건 피할 수 없다!

퍼스트 블러드는 내 차지다! 오타니, 네 첫 데스는 나에게!


그러나 다음 순간, 오타니의 이렐리아가 인간의 반응 속도를 넘어선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마치 시간을 느리게 감는 듯한, 비현실적인 움직임.

칼날 쇄도(Q)로 앞에 있던 빈사 상태의 미니언에게 번개처럼 돌진하며,

민준의 표창 두 개가 교차하는 지점을 0.1초 차이로 정확하게 회피했다.

동시에, 쌍검협무(E) 스킬의 칼날 두 개를 민준의 본체와 그림자 사이에 순식간에, 눈으로 따라가기 힘든 속도로 설치했다. 칼날이 교차하며 기절 효과를 만들어냈다.


[스턴!]


“!!”


화면 중앙에 뜬 노란색 스턴 표시.

찰나의 기절. 하지만 이렐리아에게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타니의 폭풍 같은 반격.

평타, 칼날 쇄도(Q) 리셋, 다시 평타, Q, 평타…

마치 빙판 위에서 피겨 스케이팅을 하듯,

현란하고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제드 주위를 맴돌며 칼날을 꽂아 넣었다.

민준의 제드는 순식간에 체력이 반 토막 나 버렸다.


"큭…!"


간신히 점멸(Flash)을 사용해 포탑 그늘 아래로 도망쳤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손이 떨렸다.

‘방금… 뭐였지?’

라인전의 흐름은 이미 완전히 넘어가 버린 뒤였다.


CS(미니언 막타) 숫자는 점점 벌어졌다. 오타니는 놓치는 법이 없었다.

오타니의 이렐리아는 민준의 제드를 장난감 다루듯 압도하며 무섭게 성장해 나갔다.

민준은 포탑 아래서 소극적으로 미니언 경험치나 받아먹는 신세가 되었다.


민준은 당황했다. 극도로 당황했다.

분명 같은 다이아몬드 1 티어. 하지만 오타니의 움직임은 그 이상이었다.

마치… 벽 너머의 존재, 마스터 티어, 아니 그랜드마스터 유저를 상대하는 듯한 압박감이었다.

피지컬, 뇌지컬 모두 압도당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야구만 잘하는 게 아니었어?’

‘저 미친 피지컬로 게임 재능까지 이 정도라고? 이게 말이 되냐고!’

‘신은 진짜 저 새끼한테 모든 걸 다 줬구나!’


몇 번의 솔로 킬 시도는 번번이 오타니의 신들린 듯한 회피와 정교한 반격에 막혔고,

오히려 민준의 화면이 흑백으로 변하는 횟수만 늘어갔다.

포탑 다이브조차 서슴지 않았다.


[퍼스트 블러드!]


결국, 첫 데스는 민준의 몫이었다.

포탑 바로 앞에서 소극적으로 미니언을 받아먹으려던 찰나,

오타니의 이렐리아가 작정하고 달려들었다. 미니언 웨이브와 함께.

궁극기 선봉진격검(R)까지 동원해 모든 스킬을 쏟아부으며 저항했지만,

오타니는 마치 슬로우 모션을 보는 듯 여유롭게 민준의 스킬들을 피하고 받아치며,

마지막 칼날 쇄도(Q)로 민준의 제드를 차갑게 쓰러뜨렸다.


"ShoTime_17 님이 강민준 님을 처치했습니다!"


화면 중앙에 떠오른 굴욕적인 처치 메시지.

그리고 바로 옆자리에서, 헤드셋 너머로 희미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들려오는 오타니의 나지막한 혼잣말.


"よし (요시 / 좋아)."


민준은 키보드 위에서 힘없이 손을 떨궜다.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갔다.

완패였다.

라인전 시작 불과 몇 분 만에 벌어진,

압도적인 실력 차이로 인한 완벽한 패배.


야구 천재, 조각 같은 외모, 바른 인성, 넘치는 재력, 미친 피지컬…

그리고… 이제는 괴물 같은 게임 실력까지.


‘신은… 정말로 불공평하구나.’

‘내 존재 의미는 대체 뭘까.’


잿빛으로 변한 모니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민준은 생각했다.

오타니 쇼헤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그의 유일한 자부심이었던 다이아몬드 1 티어는 너무나도 초라하고 무력하게 느껴졌다.

찢겨나간 휴지 조각처럼.


[ShoTime_17 님이 강민준 님을 처치했습니다!]


흑백 화면. 또 죽었다.

이번엔 포탑 안쪽까지 따라와서 기어이 잡아냈다.


"よし (요시 / 좋아)."


옆자리에서 또다시 들려온, 이제는 저주처럼 느껴지는 나지막한 승리의 외침.

잿빛 화면 속, 오타니의 이렐리아는 쓰러진 자신의 제드를 비웃기라도 하듯 유유히 미니언 웨이브를 정리하고 있었다. CS 차이는 이미 100개 가까이 벌어졌다.


‘젠장… 인정하기 싫은데, 진짜 존나 잘하네.’

‘저게 사람 새끼냐…’


완패였다. 라인전 시작 몇 분 만에 벌어진 실력의 격차는 명백했다.

민준은 문득 자신의 손가락이 오타니의 길고 곧은 손가락에 비해 얼마나 짧고 둔하게 느껴지는지 새삼 깨달았다.

야구공을 160km/h로 던지고, 담장을 넘기는 홈런을 때려내는 저 손이,

키보드와 마우스 위에서도 저런 신기에 가까운 퍼포먼스를 보일 수 있다니.

신은 정말로 한 사람에게 모든 재능을 몰아준 모양이었다.

불공평함에 대한 분노는 이제 체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깊은 자괴감에 빠져 있던 민준의 귀에,

다급하게 울리는 아군의 지원 요청 핑 소리가 들려왔다.

미니맵이 번쩍였다.


[아군이 당했습니다!]

[적 더블킬!]


화면 우측 상단 알림 창에 연달아 뜨는 아군의 사망 메시지.

바텀 라인이었다.

자신이 미드에서 처참하게 무너지는 동안,

아군 바텀 듀오 역시 상대에게 속절없이 킬을 헌납하고 있었다.


‘어?’


그 순간, 민준의 머릿속에 한 줄기 가느다란 희망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꺼져가던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느낌.


‘그래, 아무리 오타니 저 자식이 괴물이라도 혼자서 게임을 이길 수는 없어!’

‘리그 오브 레전드는 팀 게임이라고! 5대 5 게임이라고!’


혼자 아무리 잘해도 팀원들이 받쳐주지 않으면 승리하기 어려운 게임.

오타니가 미드에서 아무리 날뛴다 한들, 다른 라인이 전부 터져나가면 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우리 팀 다른 라이너들이 잘해주면… 혹시 모른다!


민준은 꺼져가던 투지를 다시 한번 불태웠다.


‘좋아, 내가 비록 초반에 개같이 말렸지만, 게임은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어떻게든 버티면서 후반 한타 페이즈로 넘어가면… 기회가 있을 거야!’

‘내 제드는 후반 캐리력도 좋다고!’


민준은 부활하자마자 최대한 몸을 사리며 미니언 경험치만이라도 챙기려 애썼다.

오타니의 이렐리아 눈치를 살살 보며, 포탑과 최대한 가까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소박한 희망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미드 라인을 순식간에 밀어 넣은 오타니의 이렐리아가,

와드에도 잡히지 않는 교묘한 동선으로 맵 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Mid Missing (미드 사라짐)."

[ShoTime_17(이렐리아) → 바텀 이동 중!]


민준이 다급하게 채팅을 치고 미아 핑을 미친 듯이 찍었지만, 이미 늦었다.

오타니의 이렐리아는 귀신같은 타이밍에 바텀 라인으로 향했고,

아군의 와드에 모습이 포착되었을 때는 이미 상대 정글러와 함께 아군 바텀 듀오의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한 후였다.


이어지는 현란한 칼춤.

Q로 진입해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E 스턴, R 광역 슬로우와 데미지…

아군 원딜과 서포터는 저항 한번 제대로 못 하고 녹아내렸다.

오타니는 순식간에 트리플 킬을 기록하며 아군 바텀 라인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았다.


[ShoTime_17 님이 [아군 원딜] 님을 처치했습니다!]

[ShoTime_17 님이 [아군 서포터] 님을 처치했습니다!]

[ShoTime_17 님이 [적 정글러 도움] 트리플 킬을 달성했습니다!]


"......"


민준은 할 말을 잃었다.

채팅창에는 아군 바텀 듀오의 욕설과 한숨만 가득했다.

"아니 저 이렐 뭐냐고 진짜"

"미드 차이 실화냐?"

"우리 미드 뭐함?" (<- 이 채팅에 민준은 울컥했다)


이건 단순히 ‘잘 큰’ 수준이 아니었다.

게임 전체를 지배하는 재앙, 그 자체였다. 걸어 다니는 학살 기계.

오타니는 미드 라인에 복귀해 라인을 밀면서 민준을 다시 한번 솔로 킬 내고 포탑 골드를 뜯어낸 뒤, 이번에는 탑 라인으로 향했다.


그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아군의 처절한 비명과 함께 킬 로그가 연쇄적으로 터져 나왔다.

탑에서도 더블 킬. 정글러까지 불러서 다이브.

게임 시작 15분. 글로벌 골드 차이는 이미 만 골드 가까이 벌어져 있었다.

오타니의 이렐리아는 이미 코어 아이템 3개를 뽑아낸 상태였다.


[적 팀 포탑을 파괴했습니다!] (미드 1차)

[ShoTime_17 님이 [아군 탑 라이너] 님을 처치했습니다!]

[ShoTime_17 님이 [아군 정글러] 님을 처치했습니다!]

[ShoTime_17 님이 더블 킬을 달성했습니다!]


"아니, 저 미드 뭐야? 핵 아니냐고?"

"미쳤네 진짜… 이렐 장인 부캐인가?"

"15분에 코어템 3개 실화냐… 그냥 서렌 치죠."

"15분 서렌 ㄱㄱ"


아군 채팅창은 절망과 불신, 그리고 체념으로 가득 찼다.

팀원들의 멘탈은 이미 가루가 되어 있었다.


‘이건… 이건 너무하잖아! 신이시여, 진짜 너무한 거 아닙니까!’

‘어떻게 인간이 저럴 수가 있어!’


분노와 좌절감이 뒤섞여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가, 게임마저 이렇게 압도적으로 잘한다는 사실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적어도 이 남자에게만큼은, 이렇게 허무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이 불공평한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바로 그때, 민준의 머릿속에 악마의 속삭임 같은, 지극히 비겁하고 치사한 생각이 떠올랐다.


‘옆자리… 오타니 화면을 보면…?’


게이머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행위. 명백한 반칙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의 자존심은 오타니의 이렐리아 칼날 아래 산산조각 난 지 오래였다.

이건 정정당당한 승부를 넘어선, 불가항력적인 재앙 앞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본능과도 같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민준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목 스트레칭을 하는 척하며 고개를 옆으로 슬쩍 돌려 오타니의 모니터를 훔쳐봤다.

심장이 다시 미친 듯이 뛰었다. 들키면 개망신이다.


‘헉…!’


오타니의 화면 속 세상은 민준이 보는 그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달랐다.

쉴 새 없이 전장 곳곳을 훑는 시야 이동. 마우스 커서가 맵 이곳저곳을 정신없이 오갔다.

거의 1초 간격으로 미니맵을 확인하는 듯한 빠르고 정확한 눈동자 움직임.

그리고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스킬을 사용하는 신들린 듯한 컨트롤. 현란한 손놀림.

민준의 눈에는 그저 정신없어 보이는 화면이었지만, 오타니의 손놀림에는 불필요한 움직임이 단 하나도 없었다.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모든 행동에는 명확한 의도와 계산이 담겨 있는 듯했다.

저게 정녕 사람의 플레이란 말인가.


무엇보다 민준을 놀라게 한 것은 그의 표정이었다.

치열한 교전 중에도, 방금 전 트리플 킬을 쓸어 담는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평온했다.

살짝 입꼬리가 올라가는 듯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마저도 금방 사라졌다.

마치 숨 쉬는 것처럼,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이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었다.

중요한 경기 중 마운드 위에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즐기는 것 같지도, 그렇다고 힘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당연한 일을 하는 기계처럼 보였다.


민준은 필사적으로 오타니의 움직임을 모방하려 애썼다.

오타니가 미니맵을 보면 따라서 보고, 오타니가 특정 위치로 이동하려 하면 미리 예측해서 대응하려 했다.

오타니의 화면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아군에게 위험 신호를 보내기도 했다.


‘저기… 저 부시에 적 정글러 매복하고 있네. 우리 정글러 저기로 가는데?’

[강민준(제드) → 적 정글 블루 지역에 위험 신호!]

핑을 미친 듯이 찍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오타니의 판단 속도와 반응 속도는 인간의 영역을 아득히 초월한 것처럼 느껴졌다.

민준이 그의 화면을 보고 상황을 인지하고, 그것을 자신의 플레이에 적용하려 할 때쯤이면 이미 상황은 종료되어 있었다. 우리 정글러는 이미 죽어 있었다.

오히려 어설프게 따라 하려다 자신의 동선만 꼬이고, 미니언을 놓치고, 어이없는 포지셔닝 실수까지 저지르며 데스 스택만 착실히 쌓아갈 뿐이었다.

곁눈질하느라 내 미니언 놓치는 건 덤이었다.


[ShoTime_17 님이 강민준 님을 처치했습니다!]

"아, 씨…"


결국, 민준은 다시 한번 오타니에게 속절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화면을 훔쳐본다고 해서 넘을 수 있는 실력 차이가 아니었다.

재능의 격차는 잔인할 정도로 명확했다. 비참함만 더 커질 뿐이었다.


게임은 돌이킬 수 없는 패배의 수순으로 접어들었다.

오타니의 이렐리아는 전설(Legendary) 등급을 넘어 신(Godlike)이 되어 있었다.

아군의 억제기 세 개가 모두 파괴되었고, 쌍둥이 포탑마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넥서스는 속절없이 두들겨 맞고 있었고, 화면에는 절망적인 상황을 알리는 붉은색 경고 메시지만 가득했다.

스코어는 25대 3. 그중 20킬 이상이 오타니의 이렐리아에게서 나왔다.

민준의 KDA는 0킬 8데스 1어시스트.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졌다… 이건 뭘 해도 못 이겨.’

‘그냥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민준은 마우스에서 힘없이 손을 뗐다.

키보드에 이마를 쿵 박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타니 쇼헤이. 야구뿐 아니라 게임에서도 그는 넘을 수 없는, 넘어서는 안 되는 벽이었다.

신은 왜 저런 괴물을 만들어서 나 같은 평범한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걸까.

신의 지독한 불공평함을 온몸으로 실감하며 패배를 인정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퍽!]


둔탁한 소리. 뭔가 잘못된 듯한 소리.

옆자리 오타니의 모니터가 갑자기 암전되었다.

화려한 스킬 이펙트로 빛나던 화면이 순식간에 검게 변했다.

게임 사운드도 동시에 뚝 끊겼다.


"...에?"


민준은 동그래진 눈으로 옆을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 화려한 칼춤으로 협곡을 지배하던 오타니의 이렐리아가 사라진 모니터는 검은색 화면만을 띄우고 있었다. 전원이 나간 듯했다.


오타니 역시 살짝 놀란 듯 잠시 굳어 있다가,

이내 손목시계를 힐끗 확인하고는 짧은 탄식과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약간은 아쉽다는 듯한, 하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한 표정.


"아, 時間切れか (지칸기레카 / 아, 시간 다 됐나)."


PC방 선불 시간이 다 된 것이었다.

3시간. 민준과 똑같이 3시간을 넣었던 모양이다.

저런 세계적인 스타가 고작 3시간 선불을?


순간, 게임 속 상황이 급반전되기 시작했다.

적 팀의 압도적인 캐리 유닛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오타니의 이렐리아가 갑자기 아무런 미동 없이 우물에 처박히자 (실제로는 접속 종료 상태),

넥서스 파괴 직전까지 몰려 서렌더 투표를 누르려던 민준의 팀원들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반격을 시작했다.


[ShoTime_17 (이렐리아) 님이 게임을 종료했습니다.]


채팅창에 무심하게 뜬 탈주 메시지.

오타니는 미련 따위는 전혀 없다는 듯 헤드셋을 벗어 거치대에 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치 야구 경기에서 9회 말 투 아웃까지 던지고 내려오는 투수처럼, 할 일 다 했다는 듯이.


"뭐야? 저 미친 이렐 갑자기 왜 나가?"

"렉인가? 아니면 엄마 불렀나? ㅋㅋㅋㅋ"

"시간 다 됐나 본데? ㅋㅋㅋㅋㅋ 개꿀!"

"야, 지금이다! 저 새끼 없으면 저것들 그냥 오합지졸이야! 밀어! 밀어! 넥서스!"

"우리 미드 개못하는데 이기네 ㅋㅋㅋㅋ" (<- 민준은 또 울컥했다)


아군 채팅창이 순식간에 희망과 환호, 그리고 약간의 비아냥으로 활기를 띠었다.

절망에 빠져 있던 팀원들의 눈빛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민준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다시 마우스를 잡았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오타니 쇼헤이라는 절대적인 존재가 사라진 적 팀은 순식간에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이렐리아에게 모든 성장을 몰아주었던 탓인지, 다른 라이너들은 민준의 팀원들과 비교해 레벨과 아이템 차이가 현격했다.

마치 대장을 잃은 오합지졸 병사들처럼 우왕좌왕하며 각개격파당했다.


민준의 팀은 기적처럼 마지막 한타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물론 민준은 별 도움이 안 됐다),

그대로 적진으로 달려가 텅 빈 넥서스를 파괴했다.


[승리!]


화면 가득 푸른색 ‘승리’ 문구가 찬란하게 떠올랐지만, 민준의 표정은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허탈했다.

이건 정당한 승리가 아니었다.

오타니 쇼헤이라는 신에게, 그의 재능 앞에 압도적으로 패배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다만, 그 신의 발목을 잡은 것이 PC방 선불 시간 3시간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어이없는 이유였을 뿐.

신도 PC방 시간은 어쩔 수 없나?


민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는 오타니를 멍하니 바라봤다.

오타니는 민준과 눈이 마주치자, 특유의 선하고 맑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경호원으로 보이는 건장한 남자와 함께 유유히 PC방을 나섰다.

마지막까지 평온하고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마치 동네 PC방에서 가볍게 게임 한 판 즐기고 가는, 평범한 청년처럼.

하지만 그는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


텅 빈 옆자리를 보며 민준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허탈함, 약간의 안도감 (더 이상 털리지 않아도 된다는), 그리고 그보다 훨씬 큰, 알 수 없는 궁금증과 함께 지독한 패배감이 뒤섞여 있었다.

오타니는 왜 여기에 왔을까? 왜 하필 내 옆자리에 앉았을까? 왜 롤을 하고 있었을까?


[승리!]


모니터 중앙을 가득 채운 푸른색 승리 문구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지만,

민준은 키보드 위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옆자리에서 들려오던 오타니의 차분한 숨소리,

키보드와 마우스가 만들어내는 절도 있고 정교한 소음 (민준의 요란한 타건음과는 달랐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터져 나오던 나지막한 “よし (요시)” 외침의 잔향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맴도는 듯했다.


‘이겼는데… 완전히, 처참하게 진 기분이다.’


씁쓸함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담배 한 대가 간절했다.

땀에 축축하게 젖은 손바닥을 바지에 슥슥 문질렀다.

PC방 특유의 꿉꿉하고 탁한 공기가 유난히 폐부를 찌르는 것 같았다.

오타니가 떠나간 빈자리는 오히려 그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더욱 선명하게 느끼게 했다.

그가 앉았던 의자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듯했다.


그는 신이었다.

적어도 게임 속 협곡에서는, 아니 어쩌면 현실에서도.

민준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다이아몬드 1 티어는 오타니 쇼헤이라는 존재 앞에서 구겨진 휴지 조각보다 못한 것이었다. 아니, 오타니 역시 다이아 1이었지만 그 격은 달랐다.

야구뿐 아니라 게임마저 정복해버린 남자.

그 완벽함 앞에서 민준은 깊은 무력감과 함께 지독한 열등감을 느꼈다.

세상은 왜 이리 불공평한가.


‘그래, 신은 불공평해. 인정하자. 이제 그만 포기하자.’

‘나는 그냥 이렇게 살다 죽을 운명인 거야.’


자조적인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어쩌면 오타니는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일종의 자연재해 같은 존재일지도 몰랐다.

태풍이나 지진처럼,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압도적인 힘.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아주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평범한 인간이 어찌 자연재해를 이기겠는가. 그냥 받아들여야지.


‘하지만… 잠깐.’


민준의 뇌리에 섬광처럼 하나의 생각이 스쳤다.

꺼져가던 전구에 갑자기 불이 들어오는 듯한 느낌.


‘자연재해는… 예측 가능하잖아?’

‘태풍의 예상 경로, 지진 발생 확률… 기상청은 매일 그걸 예측하잖아.’

‘그렇다면 오타니 쇼헤이라는 재앙 역시… 예측 가능하지 않을까?’


그의 예측 가능한 결과는 무엇인가?

그건 바로 **‘승리’**다.

야구 경기에서 그가 보여주는 퍼포먼스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던지면 삼진 쇼, 치면 홈런 쇼.

물론 매 경기, 매 타석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승률과 기록은 그의 압도적인 실력과 승리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가 등판하는 날, 그가 타석에 들어서는 날, 그의 팀은 이길 확률이 매우 높았다.


‘오타니는… 이긴다. 아주 높은 확률로.’


민준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좌절감과 패배감으로 흐리멍덩했던 눈동자에 기묘한 생기와 광채가 돌기 시작했다.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두근거림이었다.


‘그래, 내가 왜 저 괴물을 이기려고 발버둥 쳤을까?’

‘롤에서든, 현실에서든, 그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야.’

‘마치 인간이 맨손으로 태풍과 맞서 싸우려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짓이지.’


민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소리를 냈다. 주변 사람들이 힐끗 쳐다봤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패배주의나 자기 합리화가 아니었다.

이것은 발상의 전환이었다! 패러다임의 시프트!


‘천재를 이길 수 없다면… 천재를 이용하면 되는 거 아닌가?’


민준의 입가에,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마치 엄청난 비밀을 발견한 듯한,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오타니 쇼헤이가 언제나 승리한다면… 그의 승리에 내 돈을 걸면 되는 거잖아!’


토토. 스포츠토토.


합법적인 스포츠 베팅 시스템.

민준은 이전까지 단 한 번도 토토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불확실한 승부에 돈을 거는 행위는 어리석은 도박이라고 생각했다. 땀 흘려 번 돈을 날리는 짓이라고.

하지만 오타니 쇼헤이라는 존재는 그 ‘불확실성’이라는 변수를 상당 부분 제거해주는,

거의 **‘확실성’**에 가까운 상수였다.

그는 승리의 아이콘, 그 자체였다!


‘이거다! 이거야! 유레카!’


민준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남은 시간도 환불받지 않은 채 PC방을 뛰쳐나왔다.

아까 들어올 때와는 전혀 다른 발걸음이었다. 날아갈 듯 가벼웠다.

팍팍한 현실, 지긋지긋한 월세 걱정, 공과금 고지서, 학자금 대출 상환 독촉…

이 모든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황금 열쇠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오타니 쇼헤이라는, 걸어 다니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발견한 것이다!

신이 나를 버린 게 아니었어! 이런 식으로 길을 열어주시다니!


‘신이시여, 당신은 불공평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나에게도 기회를 주시는군요!’

‘이 오타니라는 존재를 이용해 저도 한번 사람답게 살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민준은 낡은 노트북을 켰다.

부팅되는 동안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익숙하게 롤 클라이언트를 실행하려던 손가락이 잠시 멈칫했다.

오늘은 롤 따위를 할 시간이 없었다. 그의 관심사는 이제 다른 곳에 있었다.


검색창에 ‘스포츠토토 하는 법’, ‘메이저리그 배당률 분석’, ‘오타니 쇼헤이 경기 일정 및 분석’, ‘토토 필승법’ 등을 미친 듯이 검색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정보들이 쏟아져 나왔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고 복잡했다.

배당률, 승무패, 핸디캡, 언더오버… 온갖 어려운 용어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수학적인 계산과 확률 분석, 온갖 데이터들이 눈앞을 가렸다.

하지만 민준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마치 롤 티어를 올리기 위해 밤새도록 공략 영상을 보고 장인 유저들의 플레이를 분석하던 때처럼, 뜨거운 열정으로 불타고 있었다.

아니, 그때보다 더 뜨거웠다. 이건 내 인생이 걸린 문제였다!


밤을 새워 관련 정보를 탐독하고, 전문가들의 분석 글을 읽고, 해외 사이트까지 뒤져가며 배당률 흐름을 공부하고, 커뮤니티의 예측을 찾아봤다.

오타니의 컨디션, 상대 팀 투수, 구장의 특성까지 고려해야 했다.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지만, 그만큼 더 확실한 길처럼 느껴졌다.


며칠 후, 오타니의 다음 선발 등판 경기가 잡혔다.

상대는 비교적 약체 팀. 홈 경기였다.

민준은 비장한 각오로 스포츠토토 사이트에 접속했다.

생애 첫 베팅. 그의 심장이 긴장으로 빠르게 뛰었다.

손가락 끝이 떨렸다.


‘오타니 선발 등판 경기… 당연히 팀 승리겠지? 배당은 낮지만 확실해.’

‘그리고 오타니는 괴물이니까 삼진도 많이 잡을 거야… 기준점이 8.5개? 요즘 폼 보면 무조건 넘지. 오버로 가자.’

‘타석에서도 홈런 하나 칠 것 같아. 타자 오타니 홈런 유무 YES!’

‘이 세 개를 조합하면… 배당률 괜찮은데?’


비록 소액이었지만, 민준에게는 결코 적지 않은 돈이었다.

이번 달 식비에서 떼어낸 5만 원. 떨리는 손가락으로 ‘베팅하기’ 버튼을 클릭했다.

클릭하는 순간, 이미 돈을 번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결전의 날. 민준은 새벽부터 일어나 노트북 앞에 앉아 실시간 문자 중계를 초조하게 지켜봤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손에 땀이 흥건했다.

오타니가 마운드에 오르자 숨을 죽였다.


[1회 초: 오타니, 삼자범퇴! KKK! (삼진 3개)]

"그렇지!"

[2회 초: 오타니, 삼진 2개 추가! 퍼펙트 행진!]

"나이스! 벌써 5개!"

[3회 말: 오타니, 타석 등장! 초구! … 넘어갔습니다! 선제 투런 홈런 작렬! 비거리 130m!]

"됐다! 됐어! 역시 오타니! 홈런까지!"


민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방 안에서 혼자 소리를 질렀다.

오타니는 민준의 기대를 뛰어넘는, 신들린 듯한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었다.

던지면 160km 강속구와 마구 같은 스플리터로 삼진을 잡아내고,

타석에서는 결정적인 홈런까지 터뜨렸다.


경기는 오타니 소속팀의 완승으로 끝났다.

오타니는 7이닝 동안 무려 11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승리 투수가 되었다.

모든 베팅 조건 충족.


[베팅 결과: 적중! 예상 당첨금: 123,500원]


"크아아아! 성공이다!"


민준은 방 안에서 혼자 환호성을 질렀다.

5만 원이 12만 원이 넘는 돈으로 불어났다!

앉은 자리에서 클릭 몇 번으로, 평소 하루 꼬박 아르바이트해야 벌 수 있는 돈보다 많은 액수를 번 것이다.

이토록 쉽고 짜릿하게 돈을 벌 수 있다니!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오타니는 신이야! 부와 승리의 신!’

‘이 길이다. 내 인생 역전의 길은 바로 이거였어!’


이날 이후, 민준의 삶의 중심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의 모든 관심사는 온통 오타니 쇼헤이와 스포츠토토에 쏠렸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오타니의 컨디션 관련 뉴스를 확인하고,

경기 일정을 체크하고, 배당률 변동 추이를 분석했다. MLB 앱과 토토 사이트를 번갈아 드나들었다.

밤에는 다음 날 경기 분석에 몰두했다.


롤 접속 시간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다이아 1 티어를 간신히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게임만 할 뿐이었다. (그마저도 연패하며 강등 위기였다)

그의 게임 실력은 조금씩 녹슬어갔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현실에서 돈을 버는 것이 훨씬 중요했으니까. 롤 티어가 밥 먹여주는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오타니 관련 경기에만 소액으로 신중하게 베팅하던 것이,

점점 다른 메이저리그 경기로, 나아가 다른 스포츠 종목 (축구, 농구)으로 영역이 넓어졌다.

베팅 금액도 점점 커져갔다. 5만 원이 10만 원이 되고, 10만 원이 20만 원이 되었다.

몇 번의 짜릿한 성공적인 베팅으로 통장 잔고가 조금씩 불어나자, 민준의 자신감은 근거 없이 하늘을 찔렀다.


‘나는 남들과 달라. 나는 감으로 찍는 도박꾼이 아니야.’

‘나는 ‘확실한 정보’와 ‘데이터 분석’에 기반해서 투자하는 거라고.’

‘이건 도박이 아니라 합리적인 투자야. 재테크라고.’


스스로를 그렇게 합리화했지만,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영락없는 ‘토쟁이’의 그것이었다.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수시로 배당률 변동과 실시간 스코어를 확인했고,

경기 결과에 따라 감정 기복이 롤러코스터를 탔다.

돈을 따면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하며 더 큰 베팅을 했고, "역시 난 분석의 신이야!"라며 자화자찬했다.

예상치 못한 패배나 변수(오타니가 갑자기 부진하거나, 팀 전체가 무너지거나, 심판의 오심 등)로 돈을 잃는 날에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불안감에 시달리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말도 안 돼!", "주작이야!", "내 돈 내놔!"라며 모니터에 욕설을 퍼부었다.


잃은 돈을 만회하기 위해 더 큰 금액을 걸고, 더 위험한 고배당 조합(폴더)에 손을 댔다.

냉철한 분석보다는 ‘이번엔 터질 것 같다’는 감, 혹은 ‘이만큼 잃었으니 이번엔 따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의존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처음 가졌던 신중함과 분석력은 희미해지고, 오직 ‘한 방’ 역전을 노리는 초조함과 탐욕만이 그의 마음을 지배했다.


그의 통장 잔고는 몇 번의 큰 성공과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자잘하거나 혹은 치명적인 실패를 거치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땄을 때의 기쁨보다 잃었을 때의 고통이 훨씬 컸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이미 중독되어 버린 것이다.

오타니 쇼헤이라는 ‘확실한 카드’조차,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는 스포츠의 세계와 복잡하게 얽힌 배당률 시스템 속에서는 절대적인 승리의 보증수표가 될 수 없다는 냉엄한 현실을, 민준은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오타니가 잘해도 팀이 지는 경우, 오타니가 홈런을 쳐도 삼진 개수 조건 미달인 경우 등, 변수는 너무나 많았다.


어느덧 시간은 새벽 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민준은 며칠 밤을 샌 사람처럼 퀭한 눈으로 노트북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눈 밑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화면에는 LA 다저스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경기 결과가 떠 있었다. 연장 11회까지 가는 접전이었다.

오타니는 오늘 4타수 2안타 1볼넷 멀티히트를 기록하며 분전했지만, 팀은 연장 접전 끝에 통한의 끝내기 안타를 맞고 패배했다.


민준이 ‘다저스 승리 + 오타니 3안타 이상’이라는, 고배당을 노리고 남은 돈을 거의 전부(약 80만 원) 쏟아부었던 조합은 처참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오타니가 마지막 타석에서 잘 맞은 타구가 야수 정면으로 가지만 않았어도… 3안타인데…

팀이 연장에서 한 점만 더 냈어도… 이기는 건데…


"하... 씨X..."


텅 빈 모니터 화면 위로, 깨진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흩어진 자신의 베팅 내역과 함께 **'낙첨'**이라는 붉은 글씨가 아른거렸다. 선명하고 잔인하게 빛나고 있었다.

민준은 마른침을 삼켰지만, 목구멍은 사막처럼 바싹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피식,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웃음소리는 싸늘하게 식은 방 안의 공기 속에서 길 잃은 메아리처럼 공허하게 울렸다.


책상 위에 놓인 통장. 아니, 이제는 텅 비어버린 통장을 그는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숫자가 찍혀 있어야 할 자리는 이제 처참한 ‘0’에 가까운 숫자 (정확히는 3,450원)로 채워져, 마치 그의 암담하고 텅 빈 미래를 예고하는 듯했다.

다음 달 월세는 어떻게 내지? 밀린 공과금은? 이번 달에도 어김없이 상환 독촉 문자가 날아올 학자금 대출은…?

당장 내일 아침에 먹을 라면 한 봉지 값조차 위태로운 현실이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비단 방 안의 냉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듯한, 생존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가 온몸을 엄습했다.


‘멍청한 새끼… 진짜 병신 같은 새끼…’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스스로를 향한 참을 수 없는 경멸과 혐오가 역류하듯 치밀어 올랐다.


‘도대체 뭘 기대한 거야? 오타니 쇼헤이, 그 이름 석 자만 믿으면, 저 완벽하고 위대한 재능에 편승하기만 하면, 나 같은 밑바닥 인생도 뭔가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 구원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나?’

‘결국 나는, 뭘 해도 안 되는 놈이었던 거야.’

‘게임에서 오타니에게 처참하게 발렸던 것처럼, 현실에서도, 심지어 남의 재능에 빌붙어서조차 성공할 수 없는, 구제 불능의 폐급 인생.’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


한때 마지막 남은 희망이라고 여겼던, 인생 역전의 동아줄이라 굳게 믿었던 스포츠토토.

오타니 쇼헤이라는 ‘확실한 승리 카드’를 발견했다고 흥분했던 순간들.

그 모든 것이 한낱 신기루였음을, 아니, 처음부터 자신을 더 깊은 나락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악마의 달콤한 유혹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달콤함 뒤에는 처절한 대가가 있었다.


‘그래, 오타니는 오늘도 제 몫을 했지. 안타를 쳤고, 열심히 뛰었어. 그래서 뭐?’

‘그런데 결과는? 팀은 졌고, 내 돈은 휴지 조각이 됐지.’

‘결국 오타니는 오타니고, 나는 나였던 거야. 아무 상관 없는 존재였어.’


이 얼마나 비참하고 잔인한 아이러니인가.

오타니는 여전히 저 높은 곳에서 빛나는 존재였지만, 그 빛은 이제 민준에게 희망이 아닌, 절망의 그림자를 더욱 짙게 드리울 뿐이었다.

자신은 그 빛에 잠시 빌붙어 보려 했던 하찮은 기생충이었고, 결국 숙주의 작은 실패에도 함께 나뒹구는, 아니, 오직 자신만이 더 깊은 나락으로 추락하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오타니는 내일이면 또다시 멋지게 홈런을 치고 전 세계 팬들을 열광시키겠지만, 자신은 이 차갑고 어두운 자취방 구석에서 빚 독촉에 시달리며 비참하게 스러져 가리라.


‘신은 왜 공평하지 않은가…’


이 소설의 제목처럼, PC방에서 처음 오타니를 만났을 때 던졌던 그 질문이 이제는 처절하고 잔인한 답이 되어 돌아왔다.


‘하, 이제 똑똑히 알겠다. 불공평한 게 아니었어.’

‘그냥 나한테만 엿같이 구는 거였지.’

‘오타니 쇼헤이라는 존재에게 세상의 모든 행운과 재능을 몰아주고, 나 같은 버러지에게서는 마지막 남은 숨 쉴 구멍조차 빼앗아 가는 것.’

‘그게 바로 신인지 뭔지 하는 작자가 설계한 이 거지 같은 세상의 작동 법칙이었던 거야.’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겁고 탁한 무언가가 울컥 치솟았다.

그것이 눈물인지, 분노인지, 아니면 그 모든 것이 뒤섞인 절망의 응어리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민준은 노트북 키보드에 이마를 박고 가늘게 어깨를 떨었다.

숨 막히는 절망감이 온몸을 강철처럼 짓눌렀다.

차라리 이대로 심장이 멎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이 끔찍한 현실에서 영원히 로그아웃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인생은 왜 이렇게 불공평한 걸까… 나한테만…’


극심한 피로와 정신적 탈진,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절망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토토로 날려버린 돈, 바닥난 통장 잔고, 오타니 쇼헤이라는 넘을 수 없는 벽, 그리고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자신의 암담한 미래.

이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그냥 이대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영원히 잠들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며,

민준은 깊고 어두운 잠의 심연 속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빠져들었다.

마치 죽음과도 같은 깊은 잠이었다.


얼마나 잤을까.


이상하게도 온몸이 깃털처럼 가볍고 나른했다.

며칠 밤낮으로 토토 분석과 결과 확인에 시달리며 쌓였던 극심한 피로, 온몸을 짓누르던 만성적인 피곤함이 거짓말처럼 말끔히 사라진 기분이었다.

마치 최고급 호텔 침구에서 푹 자고 일어난 듯한 상쾌함. 내 자취방 침대는 싸구려 매트리스인데?

창문 틈으로 스며든 상쾌한 아침 햇살이 눈꺼풀을 부드럽게 간질였다. 오늘은 날씨가 좋은 모양이다.


"으음..."


기분 좋은 나른함과 함께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뭔가 이상했다.

방금 자신이 낸 신음 소리가… 평소의 굵고 낮은 목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훨씬 가늘고 높았다. 미성이었다.

마치 변성기가 오기 전의 소년, 아니, 그보다 더 가녀린 소녀의 목소리 같았다.

내가 아는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뭐지? 목이 심하게 잠겼나? 감기 걸렸나?’


침대에서 내려와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향했다.

그런데 걸음걸이마저 어색했다.

평소보다 보폭이 훨씬 짧고, 무게 중심이 어딘가 위로 붕 뜬 느낌. 다리가 내 다리 같지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가슴팍에 느껴지는 이전에 없던 낯선 무게감과 봉긋한 감촉.

허리 아래로 치렁치렁하게 내려와 걸리적거리는 무언가의 감촉. 어깨에도 머리카락이 잔뜩 흘러내려 있었다.


민준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가슴과 머리카락을 더듬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것은… 봉긋하게 솟아오른 부드러운 살덩이와,

어깨를 넘어 허리까지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길고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었다.

내 머리는 짧은 스포츠컷이었는데? 내 가슴은 납작했는데?


"......!!!"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격렬하게.

설마, 설마 하는 불안하고 황당한 마음으로 화장실 거울 앞에 비틀거리며 섰다.

제발, 제발 아니기를 바라며.


그리고 거울 속에는,

생전 처음 보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소녀'**가 경악과 공포가 뒤섞인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까지 흘러내리는 찰랑거리는 윤기나는 검은 생머리.

밤하늘의 별처럼 크고 맑은, 속눈썹이 긴 눈망울.

오똑하고 예쁜 콧날과 앵두처럼 붉고 도톰한 입술.

잡티 하나 없이 뽀얗고 투명한, 백옥 같은 피부와 가녀린 목선까지.

갸름한 턱선, 작은 얼굴.


누가 봐도 만화나 게임 속에서나 나올 법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완벽한 미소녀의 모습이었다.

단지, 그 완벽한 미소녀의 얼굴에는 민준 자신의 당황스러움과 믿을 수 없다는 공포, 혼란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었다.

거울 속 미소녀가 민준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이게, 이게 대체 뭐야! 누구야!"


자신의 입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는 분명, 앳되고 청아한 소녀의 것이었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생했다.

거울 속 미소녀는 틀림없는 '나'였다.

그는, 강민준은, 하룻밤 사이에 완벽한 미소녀로 변해버린 것이다.

왜? 어째서? 어떻게?


극심한 패닉 상태에 빠져 화장실 안을 허둥대며 돌아다니던 민준은,

세면대에 머리를 박고, 다시 거울을 보고, 자신의 뺨을 때려보기도 했다. 아팠다. 꿈이 아니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오타니 쇼헤이…’


그 완벽한 남자. 야구, 게임, 인성, 외모, 피지컬…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듯한 남자.

하지만, 아무리 그 오타니 쇼헤이라 할지라도 이건 가지지 못했다.

이 ‘미소녀’라는 타이틀은! 남자인 그가 가질 수 없는 영역!


‘그래… 그래! 내가 모든 면에서 너에게 졌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봐라, 오타니! 넌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을, 나는 가졌다고!’

‘네가 아무리 완벽해도 넌 남자잖아! 난 이제 여자, 그것도 초절정 미소녀라고!’


비록 자신이 원해서 얻은 변화는 아니었지만,

이 황당하고 기괴한 상황 속에서 민준은 일종의 기묘한 우월감을 느꼈다.

처음으로, 아주 처음으로 오타니 쇼헤이라는 절대적인 존재를 마침내 이길 수 있는,

유일무이한 영역을 발견한 듯한 착각. 비록 그 영역이 '성별'이라는 황당한 것이었지만.

토토로 모든 것을 잃고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대신 신은 자신에게 이 경이로운 ‘미모’를 준 것이 아닐까?

이건 어쩌면 절망 끝에 찾아온 새로운 기회일지도 모른다! 신의 마지막 선물?


‘좋아, 이제부터 내 인생은 달라질 거야! 이 얼굴과 몸으로 뭘 할 수 있을까?’

‘당장 인터넷 방송이라도 시작해볼까? 아프리카TV? 유튜브? 여캠 하면 돈 쓸어 담는다던데?’

‘아니면 모델? 연예인? 길거리 캐스팅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터무니없는 망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밑바닥까지 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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