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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독일의 훈장들.jpg
2급 철십자장 (Eisernes Kreuz 2. Klasse)독일군의 군사 훈장으로, 일정 횟수 이상의 전투 참여와 용감한 행동을 인정받아 수여된다. 전쟁 후반에는 수여 기준이 완화되어 대중화되었지만, 여전히 수훈자는 베테랑으로 인정받았다1급 철십자장 (Eisernes Kreuz 1. Klasse)2급 철십자장 수훈자 중 추가적인 공적을 세운 이에게 수여되는 훈장이다. 전쟁 후반기에는 수여가 급증했지만, 초기에는 병사와 부사관이 받을 수 있는 최고 훈장이며, 독일군 내에서도 엄격한 심사를 거쳐 수여되었다. 총 70~80만 명이 1급·2급 철십자장을 수훈했으며, 히틀러 또한 1차 대전 수훈 받은 훈장을 평생 착용할 만큼 상징성이 컸다.기사 철십자장 (Ritterkreuz des Eisernen Kreuzes)히틀러에 의해 신설된 실질적 전공 훈장으로, 1급 철십자장의 대중화에 따라 상위 훈장의 필요성으로 도입되었다. 수여에는 객관적 전과 기록이 요구되며, 흑·백·적색 리본이 포함되어 목에 착용할 수 있으며, 수훈자는 34주간의 휴가 혜택도 주어졌다. 총 7,318명 수훈.푸르 르 메리트 (Pour le Mérite)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2세가 창설한 최고 무공훈장으로, 독일제국에서는 장군 및 고위 장교에게 수여되었다. 프랑스어 명칭은 프리드리히의 문화적 성향을 반영한 것이다. 철십자장보다 서훈 기준이 훨씬 엄격하여, 철십자 2급·1급은 이 훈장의 보완적 성격으로 도입되었다. 푸르 르 메리트는 청색 몰타 십자가 모양으로 ‘블루 맥스’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져 있으나, 이는 공식 명칭이 아니다.백엽 기사 철십자장 (Ritterkreuz mit Eichenlaub)기사 철십자장 수훈자 중 추가 전공을 세운 이에게 수여되는 상위 훈장이다. 공군 기준으로는 40~150기 격추 등 높은 전과가 요구되며, 총 882명이 수훈했다. 이 훈장부터는 히틀러가 직접 수여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고, 불가피한 경우에는 나치 고위 인사가 대신 수여했다. 대부분 본토에서 공식 수여식을 거쳤으며, 예외적으로 현지 수여도 있었다.다이아몬드 백엽검 기사 철십자장 (Ritterkreuz mit Eichenlaub, Schwertern und Brillanten)백엽검 기사 철십자장에 다이아몬드 장식을 더한 상위 훈장으로, 단순 전과뿐 아니라 국가에 특별한 공훈이 있다고 평가된 인물에게 수여된다. 수여 기준은 주관적이며, 심사를 거쳐 결정되지만 실질적으로는 히틀러의 개인 의지가 절대적인 요소였다. 총 27명 수훈.황금 다이아몬드 백엽검 기사 철십자장 (Ritterkreuz mit Goldenem Eichenlaub, Schwertern und Brillanten)기사 철십자장의 최고 등급으로, 백엽과 검이 금장으로 제작되었다. 본래 전사자 중 특별한 공훈을 세운 이들을 기리기 위해 제정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독일 공군의 최고 에이스 한스 울리히 루델 한 명에게만 수여되었다. 총 수훈자 1명.대십자 철십자장 (Großkreuz des Eisernen Kreuzes)철십자장 계열 최고등급 훈장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단 한 차례만 수여되었다. 수훈자는 나치 독일의 공군 총사령관이자 제국 원수인 헤르만 괴링으로, 형식상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전략적 지도자에게 수여된다는 기준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히틀러에 대한 충성과 정치적 공로를 치하하는 상징적 수여에 불과했다.- dc official App
작성자 : 네거티장애고정닉
대만(중화민국) 타이베이 충렬사 다녀온 사진, 영상들.jpg
충렬사(忠烈祠)는 한자문화권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 열사, 호국영령을 기념하고 제사지내는 사당을 의미함.한국에도이순신 장군을 기리기 위해 1606년에 건립된 통영 충렬사(사적 제233호)임경업 장군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충주 충렬사(사적 제189호)임진왜란에서 순국한 송상현과 정발 등 90여 위를 모신 부산 충렬사(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등 여러곳의 충렬사가 있음.내가 대만 여행간 방문한 충렬사는 타이베이에 위치한 국민혁명충렬사(國民革命忠烈祠)로 중화민국의 현충원 비슷한 지위에 해당하는 곳으로일제를 위해 순국(?)한 대만인들의 위패를 기리는 야스쿠니 신사의 분원같은 대만호국신사(臺灣護國神社) 신사 건물을 1966년에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1969년에 북경 고궁(자금성) 태화전을 모티브로 지어진 충렬사 사당임.(靖国神社の祭神で台湾に縁故がある国事殉難者, 야스쿠니 신사의 제신으로 대만에 인연이 있는 국사순난자)현재는 중화민국 건국 공로자(신해혁명), 중일전쟁(항일투쟁), 국공내전, 진먼 포격전 전사자, 일치시기(日治時期)의 일본에 항거하다 희생된 자 등 중화민국을 위해 순국한 39만여명을 기리고 있으며충렬사 안치 기준은1. 작전 시 승리를 얻기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어려움을 불사하여 공을 이뤘으나 희생당한 자2. 작전 시 맡은 바 최선을 다하여 죽음을 달게 받던 자.3. 위험 특수 임무를 수행하다가 사망하여 총통에 의해 표창령을 받은 자충렬사의 패루(牌樓).중앙에 잘보면 위병 2명이 근무를 서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좀 지나치게 부동자세에 칼각이여서 가까이 가서 의장복 옷깃이 바람에 휘날리는걸 보기 전까지 마네킹인줄 알았음;;충렬사의 산문(山門).바닥에 다섯줄로 길~게 녹슨 자국같은게 보이는데, 뭔지는 밑에 나옴.본당군열사(軍列寺)문열사(文列寺)충렬사 전체 면적은 5만 2천여 평방미터로 타이베이 시내에 위치한 것 치고 상당히 넓은 면적임.내부에는 나 말고 다른 관람객들이 없는데이유는 아마도 보통 의장병들 사열식만 구경하고 가고 내부 사당까지 보러오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라고 생각됨.위병 2명이 보초를 서고 있는 본당 가운데 위치한 위패는 특정한 인물의 것은 아니고, 순국자 전체를 기리는 것.신해혁명 당시 광저우 봉기를 묘사하는 부조(浮彫).중일전쟁 당시 상하이 전투에서의 항일투쟁을 묘사한 부조(浮彫).장총통, 국민당 1차 동정(북벌)의 성패를 결정지은 대승, 면호전투를 묘사한 부조(浮彫).1949년 금문도 전투(금문도에 상륙한 공산군 제 10군단을 격퇴한 전투, 이 전투의 승리로 금문도를 완전히 확보했고 공산군의 대만 침공 계획을 중단시켜서 대만섬의 중화민국 정부가 존속할 수 있게 됨)를 묘사한 부조(浮彫).군열사(軍列寺) 내부 위폐들.백마탄 장총통.1945년 9월 9일 장제스 총통에게 항복하는 지나파견군 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 대장.오카무라 야스지 대장은 제1군 참모장 다나카 류키치(田中隆吉)와 함께 중국에서의 삼광작전(三光作戰) 살광(殺光, 전부 죽이고) 소광(燒光, 전부 태우고) 창광(搶光, 전부 빼앗아라)을 주도한 인물이며 육군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구상한 인물이다.육군에서 위안소를 추진한 이는 파견군 참모부장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였다고 합니다.그 동기는 점령지에서 빈발한 중국인 여성에 대한 일본군인들의 강간 사건으로 중국인의 반일 감정이 더욱 강해지는 것을 우려하여 방지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데 있었습니다. 또 장병이 성병에 걸려, 병력이 저하되는 것도 막으려고 생각하였습니다.예전의 전쟁 시대에는 위안부 등은 없었다. 이렇게 말하는 나는 부끄럽지만 위안부단 창설자이다.쇼와 7년(1932년) 상하이 사변 때 두세 건의 강간 사건이 발생하였기에 파견군 참모부장이었던 나는 같은 지역 해군을 본떠, 나가사키현 지사에게 요청하여 위안부단을 불렀고, 그 후 전혀 강간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기뻐하였다.현재 각 병단은 거의 모두 위안부단을 수행하여 병참의 일 분대가 된 형태다. 제6사단 같은 부대는 위안부단을 데리고 다니면서도 강간이 끊이지 않는 상태이다."오카무라 야스지 대장 자료 제1 전장 회상편" 1970년, 302~303쪽매우 덥고 습한 날씨에 하복이라곤 해도 긴팔 의장복 풀세트를 갖추고 근무 교대를 위해 사열하는 의장대 병사들.(1시간에 한번씩 교대함)이날 타이베이 날씨는 구름도 안낀 떙볕에 최고 온도 44도 가량에 습도 90%였음.바닥에 다섯줄로 길~게 녹슨 자국이 있었던 이유:징박힌 전투화를 신은 의장병들이 수십년 동안 완전히 같은 동선으로 계속 이동해서;;여기서 개인적으로 상당히 불쾌했던 부분은중일전쟁(항일투쟁) 순국자를 기리고 일본군의 만행 관련한 전시가 있는 현충원 같은 곳에서단체 버스타고 온 일본인 관광객들이 의장병들 사열하는 모습 보면서 "헤에~ 스게~" 해대면서 웃고 떠들었다는 점...아마 패키지 여행으로 온 일반인 관광객들이 정확히 어떤 곳인지 알고와서 그랬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가이드가 어떤 장소인지 별로 설명도 안하고 의장대 사열만 보고 바로 가버림)내 기준에선 "일본인"이 아니라 "쪽바리" 같은 느낌이었음.
작성자 : 마아가림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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