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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벗은 국토를 녹색으로 바꾼 과학자 현신규에 대해서 알아보자
요즘 한국 산 보면 그냥 당연히 푸르니까 감이 안 오긴하는데불과 전후 세대만 해도 이 나라의 산림면적 절반이 헐벗은 황폐지였던건 다들 알꺼임그리고 이 민둥산 나라를 진짜로 뒤집는 데 핵심 역할을 한 사람이 현신규 박사임 “한국 임목육종학의 창시자”, “한국 임학의 대부”, “산림녹화의 선구자”,“민둥산의 기적 이룬 임학박사 1호” 등등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오는 인물임 즉 한국의 숲을 다시 재창조한 사람임현신규의 출생연도는 1912년도 였음 휘문고보를 거쳐 수원고등농림학교 임학과를 졸업하고, 1936년 일본 규슈제국대학 임학과를 마쳤음 원래는 철학과를 하고 싶었는데, 집안 사정으로 임학과를 졸업하게 되었다함이후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에서 일했고, 해방 뒤에는 수원농림전문학교와 서울대 농과대학에서 교육과 연구를 이어갔음 식민지 시절부터 조선인으로서 드물게 체계적인 임학 교육을 받은 인물이었고, 그 경력이 해방 뒤 한국 임학계의 중심으로 이어졌음이게 왜 중요하냐면, 해방 직후 한국은 산림도 망가졌고, 임학 인력도 거의 없었음그런데 현신규는 임학을 정식으로 깊게 배운 몇 안 되는 핵심 인력이었음.사실상 폐허인 산림판에서, 매뉴얼 알고, 실험도 알고, 후배도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고인물이었던 셈임현신규는 1949년 규슈제국대학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한국의 첫 임학박사였음현신규 하면 제일 먼저 나오는 게 리기테다소나무임산림청 자료에 따르면 그는 리기다소나무와 테다소나무를 교배해, 해충과 추위에 강하고 생장과 재질도 우수한 리기테다소나무를 개발했음 산림청은 이를 세계적 임목육종 성과로 소개했고, 유엔식량농업기구(FAO) 가 탁월한 육종 성과로 인정했고 미국 상원에서도 ‘한국의 기적의 소나무’로 보고되었다고 적고 있음전후 한국 산림은 좋은 환경이 아니었음 척박하고, 추위 타고, 빨리 자라야 하고, 병충해에도 버텨야 했음.그런데 그냥 나무 많이 심자로는 안 됨. 우리 산에 버티면서도 빨리 크는 품종이 필요했고현신규는 바로 그 문제를 품종 개량으로 해결했음 그래서 리기테다소나무는 산림복구용 실전무기로 높은 평가를 받았음 현신규의 또 다른 대표작이 은수원사시나무, 흔히 현사시라 불린 나무임 은백양나무의 빠른 생장력과 건조 저항성, 수원사시나무의 곧은 수형을 겸비한 교배종을 만든건데생장이 빠른 이태리포플러 여러 품종을 도입,검토하는 과정에서 경사진 땅에서 잘 자라는 은수원사시나무를 개발되었음전후 산림녹화 사업은 단순히 보기 좋은 숲 만들기가 아니었음산사태 막아야 하고, 연료,목재도 확보해야 하고, 국토를 빨리 회복시켜야 했음.그래서 빨리 자라는 속성수가 절실했는데, 현신규는 우리 땅 사정에 맞는 포플러류와 현사시를 밀어붙여 이 문제를 풀려 했음현신규는 1953년부터 이태리포플러 도입에 큰 열의를 보였는데, 그 이유가 당시 한국에 가장 시급했던 것이 속성수를 많이 심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음현신규는 서울대에 임목육종학연구소를 세우고, 국가 차원의 임목육종연구소 설립도 주도했음 또 1960년 한국임학회를 창립해 초대 회장을 맡았고, 1969년엔 한국육종학회 창립도 이끌었음 즉, 나무만 기른게 아니라 후세대도 길러낸거임 현신규는 1963년부터 1965년까지 농촌진흥청장을 지냈고, 이후 서울대 농과대학 교수로 돌아가 정년까지 임학교육에 투신했음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가 1960~70년대 국가적인 조림 사업과 산림녹화의 방향에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끼쳤다는 점임 현신규는 산림자원이 곧 국부의 척도라는 산림부국론을 주장하며 국가 조림사업을 주도했고, 특히 1차 치산녹화 10년 계획(1973~1982)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조림을 추진해 우수한 임목 보급을 확대하는데 공헌했음현신규의 업적과 1차 치산녹화 10년 계획은 한국이 1982년 유엔으로부터 2차 세계대전 이후 산림복구에 성공한 유일한 국가라는 평가를 받는 데 크게 기여했음 1973~1987년 프로그램으로 국토의 약 20%에 해당하는 황폐 산림을 복구했고, 그 성공이 대한민국과 경제성장과 삶의 질 향상의 토대가 된거임그리고 산림청은 한국 사례를 두고 한 세대 만에 헐벗은 국토를 녹화한 대한민국의 사례라고 표현하고 있고 이 말대로 그야말로 한 세대 만에 벌거숭이 산을 숲으로 바꿔낸거임또한 그는 서울대 농과대학과 임목육종연구소를 통해 많은 임업 인력을 양성, 배출하여 산림녹화의 인적 기반을 구축했음현신규 박사는 1964년 3·1 문화상, 1978년 5·16 민족상, 1982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고, 2017년에는 초대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로 지정되었음 또한 산림청의 숲의 명예의 전당에도 헌정되어 있는 전설적인 인물이지만 대중적인 인지도는 낮은편임그러나 그가 남겨놓은 유산인 대한민국의 푸르른 숲은 계속 영원히 기억될꺼임
작성자 : ㅇㅇ고정닉
한국 원자력계의 대부 한필순 박사에 대해서 알아보자구
한국 원자력의 대부..라 하면 누가 있을까?이쪽 분야에서 일하는 게이라면 알겠지만당연히 한필순 박를 이구동성으로 외칠꺼임한국 원자력이 외국 기술 받아 조립만 하던 단계에서, 핵연료도 만들고 원자로도 설계하고 연구용 원자로도 자체 개발하는 단계로 넘어가게 만든 핵심 인물,이 사람이 바로 한필순임생애부터 보면 약간 의외였음 1933년 평남 강남군 출생, 공군사관학교를 나와 레이더 정비 장교를 했고, 그 뒤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일리노이대 석사, UC 리버사이드 박사등등 엘리트 코스를 밟았음 이후 1970년부터 1982년까지는 국방과학연구소에서 레이저,야시장비 연구부장을 맡아 무기 국산화에도 관여했고, 1982년에 한국에너지연구소 대덕공학센터장으로 가면서 본격적으로 원자력판에 들어왔음 즉, 처음부터 원자력만 판 사람이라기보다, 국가 기간기술 자립 프로젝트를 계속 맡아온 실무형 거물에 가까운 인물임근데 이 사람이 왜 그렇게까지 중요하게 평가되냐고? 왜냐하면 원자력 기술자립의 핵심 고비를 해결한 인물이기 때문임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과 한국핵연료주식회사 사장을 1982년부터 1991년까지 맡으면서, 1. 중수로,경수로 핵연료 국산화 2. 한국 표준형 원자로 개발3. 다목적연구용 원자로 하나로 개발 지금이야 국산화라는 말이 흔하지만, 그 시절엔 원전 핵심기술은 외국이 꽉 쥐고 있어서 돈 준다고 다 넘겨주는 것도 아니었음 한필순은 여기서 그냥 기술 사오는 나라로 남지 말고, 공동설계와 자체 축적을 통해 우리 손에 기술이 남게 해야 한다고 보았고이를 밀어붙였음가장 중요한 업적중 하나가 중·경수로 핵연료 국산화임 원자로는 있어도 핵연료를 못 만들면 결국 남의 코드를 계속 입력받아야 하는 처지인데, 한필순은 역으로 이걸 기술자립의 출발점으로 봤음 1983년부터 사업을 밀었는데, 처음엔 캐나다 쪽 기술지원을 검토했지만 비용 문제로 틀어졌고, 대신 독일과 공동설계 방식을 택했음. 그냥 완제품 사는 게 아니라, 소수 정예를 보내 기술을 익혀오고 국내 쪽이 실제로 설계와 생산 역량을 쌓는 방식을 택한거임 그 결과 1987년 중수로용, 1989년 경수로용 핵연료 생산공장을 세워 국산화를 달성했고, 이후 한국 원전에는 우리 핵연료가 들어가기 시작했음 . 두 번째는 한국 표준형 원자로 개발임 1980년대 초까지 한국 원전 건설은 사실상 해외 기술 의존이었는데, 한필순은 연료만 국산화해봤자 껍데기 설계를 못 하면 반쪽짜리 자립이라고 보고, 발전소 건설의 핵심인 원자로계통 설계 국산화 사업을 추진했음 여기서도 공동설계 방식을 활용해 영광 3·4호기를 대상으로 설계를 진행했고, 이 과정이 쌓여 1996년 준공 시점엔 1000MW급 가압경수로의 국산화율이 95%까지 올라갔음 이게 바로 한국 표준형 원자로의 토대가 되었고, 훗날 한국이 원전 수출국으로 올라서는 기반이 된거임 원전 한 기 수입해서 돌리는 나라와, 원자로 계통을 설계,운영·수출할 수 있는 나라는 급이 완전히 다른데, 그 경계선을 넘기도록 한 인물 중 하나가 바로 한필순임세번째는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 개발발전용 원전만 돌린다고 나라 기술이 올라가는 게 아님 연구용 원자로가 있어야 재료시험, 중성자 이용 연구, 동위원소 생산 같은 기반이 생기고, 연구자와 기술이 같이 크는 법임 한필순은 기존 TRIGA 연구용 원자로들이 노후화된 상황에서 고출력 신형 연구용 원자로가 필요하다고 보고 국산 개발 계획을 세웠고, 이쪽 계통에서 일하면 모를수가 없는 1995년 하나로가 만들어졌음 당장 전기만 생산하자가 아니라, 연구 생태계까지 같이 깔아놓은 거임한필순은 기술만 본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키우는데에도 집중했음그는 젊은 연구자들을 꾸준히 해외에 파견해 선진 기술을 배우게 했고, 그 인력들과 함께 국내 원자력기술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렸음 이게 왜 중요하냐면, 기술자립이란 게 설비 몇 개 들여온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그걸 굴리고 개선하고 다음 세대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 집단이 생겨야 진짜 자립이기 때문임 한필순은 프로젝트 관리자를 넘어서서 원자력판 인재 양성 총감독이기도 했음한국원자력학회 회장을 지냈고, 프랑스 국가훈장 레지옹 도뇌르를 받았으며, 2010년 과학기술훈장 창조장을 받았음 2015년 타계 후에는 대전국립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묘역에 안장됐었고.. 그의 기술자립 의지가 2009년 UAE 상용원전 수출의 바탕이 되었다고 평가되고 있음 원자력 찬반 논쟁이야 지금도 치열하지만, 한국이 원전 기술을 남의 손만 바라보는 나라에서 일정한 독자 역량을 가진 나라가 되는 데 한필순이 결정적이었다... 는 평가는 부정할수 없는 사실일꺼임
작성자 : ㅇㅇ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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