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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에서 중국군이 패한 과정...JPG
..서양의 군함과 대포 앞에 무력한 모습을 보이던 군대를 개선하기 위한 또 다른 방책은 도가의 신비한 방술이나 사찰의 권법을 채용하는 것이었다.예를 들어 무술의 고수들이 물속에서 호흡하지 않고 10시간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있다고 장담하자 이들을 고용해 강물 속에 들어가 영국 전함의 바닥에 구멍을 뚫으려 하기도 했다.(중략)...이렇게 해서 이처럼 나라가 위급한 순간에 경전 연구를 중단하고 몰려든 열정적이지만 미숙한 젊은 서생들로 구성된 대규모 참모진이 구성되었는데, 장교들은 모두 앞다투어 자기 관품에 해당하는 호위병과 보조금 등을 요구했다. 따라서 지휘 계통이 분명히 서지 못했으며, 특히 여러 성에서 파견된 정규군들이 다른 지휘관의 명령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그러나 멋진 깃발, 수를 놓아 장식한 전투복, 번쩍거리는 무기 뒤에 가려 군 내부에 존재하는 이러한 분열은 간과되었다. 이들 서생들은 군 진영 내에서 여러 차례 다회와 연회, 그리고 시사문회 등을 개최하는 등 활기에 차 있었다. 실제 전투에 들어가기 한 달 전에 한 유명한 화가가 강렬한 색채의 아름다운 북송 원체화법으로 전투에서 승리하는 장면을 묘사하기도 했다. 심지어 총사령관 혁경 자신이 한 차례 글짓기 대회를 개최해어느 글이 앞으로 있을 승리를 선포하는 포고문으로 가장 잘 쓰였는지를 결정하느라고 며칠간을 바쁘게 보내기도 했다. 마침내 그는 교전 상황과 각각의 지휘관들이 어떻게 명령을 하달하고 전공을 표창하는지를 가상으로 그린 작품을 하나 골랐다.도광제의 사촌(혁경)이 전투를 언제 개시하는 것이 가장 좋을지를 놓고 어느 정도 고민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그가 어느 하루 항저우의 한 사당에서 길일을 점치는 것으로 간단히 해결되었다. 그는 '호랑이' 점괘를 뽑았다.이를 근거로 공격 시간은 정확히 호랑이에게 길한 임인년 인월 인일 인시, 즉 1842년 3월 10일 새벽 3~5시 사이로 정해졌다.그런데 이떄는 공교롭게도 비가 많이 오는 봄철이었다. 그리하여 군사들은 발이 푹푹 빠지는 길을 힘겹게 걸어와 바퀴 자국들로 어지러운 진창투성이 진지에 투입되어야 했으며, 더욱이 전투 전날 밤까지도 도로 사정 때문에 군수물자가 제대로 조달되지 못해 대부분이 여러 날 굶은 상태였다. 거의 탈진 상태에다 비에 흠뻑 젖은 몸을 이끌고 주린 배를 움켜쥐며 병사들은 공격을 준비했다.공격은 세 방향으로 개시되었다. 원래의 전투 계획에 따르면 36000명이 닝보의 서문과 남문으로 진격하고, 15000명은 전하이를 탈취하며, 1만 명의 수군은 전함이나 어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 저우산을 재탈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 병력의 60%가 참모본부의 호위병으로 파견되었고, 혁경은 술 생산지로 유명한 사오싱에 있는 사령부 주위에 개인 병력 3000명을 주둔시켜놓고 있었다.나머지 지원 부대는 혁경의 참모장의 지휘 아래 닝보와 전하이를 잇는 교량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리하여 실제로는 대략 4000명의 병사만이 공격에 나섰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마저도 아무도 선봉에 서려고 하지 않았다.이처럼 모두가 머뭇거리고 있는 바람에 닝보 공격의 선봉 역할은 700명의 쓰촨 병사들에게 돌아가고 말았다. 이들은 기습 공격의 원칙을 준수해 최후의 순간까지 총을 쏘지 말라고 명령받았지만베이징어를 거의 할 줄 몰랐던 그들의 지휘관은 이를 총을 절대 휴대해서는 안 된다는 지시로 이해했다. 이로 인해 이들 진촨 토박이들은 칼 한 자루만을 손에 들고 영국 공병대가 매설해놓은 지뢰지대와 아일랜드 병사들의 유탄포 사정거리 안으로 유유히 걸어 들어갔다. 영국군이 발포를 개시하자 다른 미숙한 청군들이 이들 쓰촨 병사들의 후방으로 달려들면서 수천 명이 서문으로 몰리는 상황이 되었고, 곧 주변 거리에는 피가 강물을 이루었다. 영국군은 겁에 질려 우왕좌왕하는 청군들을 차례차례 학살해버렸다. 이 끔찍한 대살육에 영국인들조차 구역질을 느낄 지경이었다.만일 혁경이 지원 부대까지 투입했다면 그들은 아마 이 도시를 탈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묘한 아이러니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일이지만 후방의 지원 부대를 지휘하고 있던 그의 참모장은 가마 위에서 아편을 흡연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병력도 필요한 때는 이미 아편에 취한 상태였다. 그의 군관과 병사들은 첫 번째 포성을 듣자마자 도망쳐버렸다.이렇게 되자 단지 저우산 방면의 수군만 남게 되었는데,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항구를 출발하자마자 대부분의 병사들이 뱃멀미를 했고, 지휘관은 영국 함대를 만날까 두려워 이후 20여 일 동안 연해를 따라 배를 몰고 왔다갔다하면서 정기적으로 전투 상황을 허위로 보고했다. 이리하여 아편전쟁에서 청군이 감행한 마지막 공세는 끝났고, 그와 함께 명예로운 강화를 위한 모든 가능성도 사라졌다.존 K. 페어뱅크 - 캠브리지 중국사 10권 中1. 서양유럽이 근대과학으로 무장할때중국군은 전근대적 도가사상이나 권법무술 망상 2. 중국군은 근대식 참모진의 부재로 지휘계통 난립, 보급능력 부족, 무능한 지휘로 어이짐3. 작전구상 없이 공격 날짜를 점괘 미신에 의존중국군 지휘관과 참모장은 아편 빨다가 포성 듣고 도망감4. 결과는 영국의 일방적인 중국군 대살육 ㄷㄷ중국은 이후에도 아편전쟁의 교훈을 얻지 못하고 또 의화단 전쟁으로 서방에게 일방적인 패배 학살을 당하고 만다전훈을 얻고 배워야 하는 이유 ㄷㄷ
작성자 : ㅇㅇ고정닉
10월 7일의 진실: IDF 병사의 증언과 음모론의 그림자
오랫동안 가짜깃발(false flag)를 의심했던 10월7일 사건에 대한 순찰병사의 증언이 나왔다. 링크를 따라가면, 영어자막을 단 5분 가량의 동영상이 나온다. 지미 도어 쇼에서는 이 영상을 틀면서 대담을 한다.10월 7일의 진실: IDF 병사의 증언과 음모론의 그림자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은 중동 지역의 긴장된 정세를 다시 한번 세계의 이목으로 끌어올렸다. 이 공격은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낳았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둘러싼 논란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을 넘어, 음모론과 정치적 의혹으로 확장되었다. 특히, 한 IDF(이스라엘 방위군) 병사의 증언은 이 사건의 배후에 이스라엘 정부의 의도적 방관 또는 조작이 있었다는 주장을 부추기며 논쟁의 중심에 섰다. 해당 병사의 증언을 바탕으로 10월 7일 사건의 맥락, 그에 대한 음모론적 해석, 그리고 이러한 주장의 타당성과 한계를 생각해본다.사건의 배경과 병사의 증언2023년 10월 7일 새벽, 하마스는 이스라엘 남부 지역을 대상으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이 공격은 로켓 발사, 지상 침투, 그리고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로 구성되었으며, 특히 노바 뮤직 페스티벌(레이브 파티)에서의 학살은 전 세계적으로 충격을 주었다. 이스라엘은 세계에서 가장 첨단화된 국경 감시 시스템을 갖춘 국가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가자지구와의 국경은 철저한 감시 아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마스는 패러글라이더와 같은 비교적 원시적인 수단을 통해 국경을 뚫고 침투했다는 점에서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다.이러한 배경 속에서 한 IDF 병사의 증언은 사건의 전말에 대한 의혹을 증폭시켰다. 이 병사는 10월 7일 새벽 5시 20분, 골라니 여단 사령관으로부터 GAZA국경을 따라 모든 순찰을 중단하고 현재 위치를 유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크네셋(이스라엘 의회) 위원회에서 “왜인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울타리 순찰은 없었다”며 당시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전했다. 이 명령은 오전 9시까지 상황 평가가 완료될 때까지 유지되었으며, 병사들은 아무런 추가 지시 없이 대기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오전 6시 30분, 사이렌이 울리며 공격이 시작되었고, 병사들은 준비 부족 속에서 전투에 임해야 했다. 그는 이 사건 이후 “머릿속에 구멍이 뚫린 것 같다”며, 왜 이런 명령이 내려졌는지에 대한 답을 찾고자 크네셋에 증언했다고 밝혔다.음모론의 등장: 네타냐후와 하마스의 관계이 병사의 증언은 음모론자들 사이에서 이스라엘 정부, 특히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이 공격을 의도적으로 방관하거나 조장했다는 주장을 강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일부 음모론자들은 네타냐후가 하마스를 재정적으로 지원함으로써 팔레스타인 내부의 더 급진적인 세력을 키웠다고 주장한다. 이는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같은 세속적이고 덜 호전적인 단체를 약화시키고, 하마스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함으로써 이스라엘의 강경 정책을 정당화하려는 의도였다고 본다. 또한, 10월 7일 공격이 가자지구를 점령하고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몰살하려는 계획의 일환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이러한 음모론은 “거짓 깃발(false flag)” 작전이라는 개념과 연결된다. 이 사건이 완전한 거짓 깃발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이 하마스의 공격을 허용함으로써 정치적·군사적 이익을 도모했다는 것을 틀림없다. 예를 들어, 네타냐후가 하마스의 자금줄을 지원하고, 공격 당일 군사적 대응을 지연시켰다는 의혹은 그의 정치적 생존(특히 부패 혐의로 인한 재판 회피)과 가자지구 점령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고 해석된다. 또한, 하니발 지침(Hannibal Directive)—인질이 적에게 납치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극단적인 조치를 허용하는 IDF의 정책—이 적용되어 민간인 사상자를 초래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음모론의 타당성과 한계이러한 음모론적 주장은 강렬한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키지만, 몇 가지 한계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병사의 증언은 개인의 관점과 한정된 정보를 기반으로 하며, 전체적인 상황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는 하급 병사로서 명령의 배경이나 고위급 의사결정 과정을 알 수 없었음을 스스로 밝혔다. 따라서 그의 증언은 혼란과 의문을 반영하지만, 네타냐후 정부가 의도적으로 공격을 방관했다는 직접적 증거로 보기는 어렵다.둘째, 하마스에 대한 이스라엘의 자금 지원 주장은 복잡한 맥락을 단순화한 측면이 있다. 이스라엘은 카타르를 통해 가자지구에 자금을 전달해왔지만, 이는 주로 인도적 지원과 지역 안정화를 목적으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마스가 이 자금을 무기 구입이나 군사적 목적에 전용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이를 이스라엘이 직접적으로 테러를 조장했다고 단정 짓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또한, 하마스의 공격이 성공한 이유는 이스라엘의 방어 시스템 실패, 정보 수집의 허점, 그리고 하마스의 치밀한 계획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아야 한다.셋째, 하니발 지침과 같은 정책은 이스라엘 군사 전략의 극단적 측면을 보여주지만, 이를 10월 7일의 모든 사상자와 연결 짓는 것은 과도한 일반화다. 인질 상황에서의 군사적 대응은 복잡한 윤리적·전술적 판단을 요구하며, 이를 단순히 “민간인 학살”로 규정하는 것은 사건의 전모를 왜곡할 수 있다.결론: 진실과 음모 사이10월 7일 하마스의 공격과 IDF 병사의 증언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복잡성과 그로 인한 비극을 다시금 드러낸다. 병사의 증언은 군 내부의 혼란과 의사소통 문제를 보여주며, 이스라엘의 방어 시스템이 완벽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를 바탕으로 한 음모론은 사건의 일부만을 부각시켜 과도한 결론을 도출하려는 경향이 있다. 네타냐후 정부의 정치적 동기나 하마스와의 관계는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하며, 단순히 음모론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이 사건은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이 여전히 필요함을 보여준다. 병사의 말처럼, “머릿속 구멍”을 채우기 위해서는 투명한 조사와 책임 있는 대응이 필수적이다. 음모론은 사람들의 불신과 분노를 대변할 수 있지만, 그것이 진실을 온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진실을 밝히는 노력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당국이 스스로 진실을 밝히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지금 자행하고 있는 인종 청소 대량학살이 처음부터 기획된 것임을 자인하는 것이 된다. 멸망으로 향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더 늦기 전에, 비극의 상황에 처한 팔레스타인을 인종청소로 몰고 가지 말고, 갈등의 근본적 원인을 직시하고, 지속 가능한 평화를 위한 노력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작성자 : 흰콩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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