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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에도 그 현대인은 절망한다."
“어느 시대에도 그 현대인은 절망한다.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 때문에 또 절망한다.”-잡지 <시와 소설>의 이상이 쓴 첫머리(이상임)- - -싱글벙글 웃고있는 짤과 그렇지 못한 그의 일화들- - -1-양어머니가 자식을 못낳는 스트레스를 이상에게 풀고 친아들이 태어나자 대놓고 홀대함2-그림에 재능이 있고 좋아했는데 아버지가 기술자가 최고라고 경성공업고등학교 건축학과 수석졸업(현 서울대 공과대학)*백부는 재능에만 집중하고 엄격히 대했다고함.3-이상을 키운 몰락 양반집 백부가 죽자 친가로 돌아왔으나 손가락이 잘린 가난한 이발사 아버지 집안이었던지라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함이는 그의 소설에 나와있음."나는 그분들께 돈을 갖다 드린 일도 없고 엿을 사다 드린 일도 없고 또 한 번도 절을 해본 일도없습니다. 그분들이 내게 경제화(經濟靴)를 사주시면 나는 그것을 신고 그분들이 모르는 골목길로만 다녀서 다 해뜨려 버렸습니다. 그분들이 월사금을 주시면 나는 그분들이 못 알아보시는 글자만을 골라서 배웠습니다. 그랬건만 한 번도 나를 사살하신 일이 없습니다. 젖 떨어져서 나갔다가 23년 만에 돌아와 보았더니 여전히 가난하게들 사십디다. 어머니는 내 대님과 허리띠를 접어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내 모자와 양복저고리를 걸기 위한 못을박으셨습니다. 동생도 다 자랐고 막내누이도 새악시 꼴이 단단히 박였습니다. 그렇건만 나는 돈을 벌 줄 모릅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버나요, 못 법니다. 못 법니다."이상, <슬픈 이야기 中>4-한창 문학활동 하던시기 건축기사로 일하는데 일본인 상사 때문에 스트레스 받다가 결국 폐결핵(치료제는 광복후에 나왔음, 당시 불치병)진단 받고 결국 그만둠"흔히 객혈로 인한 건강이 오빠의 사직이유로 말합니다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일인(日人) 과장의 이제는 더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박차고 나온 오빠였습니다. 오빠의 몸은 그때부터 극도로 쇠약하기 시작했습니다. (…) 배천온천으로 요양을 떠난 것은 이 무렵의 일입니다."―김옥희, 「오빠 이상」5-회사 그만두고 온천 요양갔다가 알게되어 사랑한 금홍이(연심이)라는 기생을 데려와 종로에 [제비]라는 다방을 차렸는데 장사가 잘 안됐고 금홍이가 자꾸 외박하더니 결국 가출해서 돌아오지 않았음결국 다방은 망함."하루 나는 제목없이(느닷없이) 금홍이에게 몹시 얻어맞았다. 나는 아파서 울고 나가서 사흘을 들어오지 못했다. 너무도 금홍이가 무서웠다."이상, <봉별기(逢別記) 中>아래는 이상에 대한 평가 중 하나. 이상이 상당히 금홍이를 사랑했음을 알 수 있다."진실로 여자를 사랑할 줄 아는 남자이면 믿어도 좋다. 그런 남자는 결코 악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아니 이상이야말로 여자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고로 「지주회시」, 「날개」, 「동해」 기타 이상의 작품에 나타나는 이상과 그의 아내들을 나타난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인간 이상을 정당하게 이해할 수 없다. 공개된 석상에선 결코 진실을 고백치 않는 것이 이상의 엑센트리크한 성질이기 때문이다. 작품에 나타난 이상 자신은 모두가 인간 이상의 껍질이 아니면 그림자에 불과하다."정인택, 「불쌍한 이상」(1939.12)<이상의 사후, 조선일보 1939년2월22일 호에 박태원이 쓰고 그린삽화. "금홍이도 사라지고, 축음기도 팔아먹은" 다방의 현실을 묘사해놨다.>당시의 경성의 다방은 여러가지 지식인들이 모여서 작품등에 대해 토론하는 공간이었다고 하는데 이상의 [제비]에 경우, 축음기가 있어서 음악을 들을 수 있었고, 구본웅이라는 친구가 그려준 여러가지 그림들을 전시해놓기도 했다고 함.6-회사를 그만뒀을때 정지용의 소개로 문학활동을 시작했는데(이 때에 [거울]이 발표됨), 이후 다방 [제비] 드나들던 문인들의 추천으로 구인회에 가입함.가입 후 오감도를 연재했지만 독자들에게 잔뜩 욕먹고 연재 중단. 동료들만 천재성을 인정해줬음."대체 ‘조감도’를 일부러 ‘오감도’라고 오자를 낸다는 것부터가 알 수 없는 노릇이 아니냐고, 신문사 교정부와 공장에서부터 말썽이었다."김기림, <이상의 모습과 예술> (1949)"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 년씩 떨어져도 마음 놓고 지낼 작정이냐. 모르는 것은 내 재주도 모자랐겠지만 게을러빠지게 놀고만 지내던 일도 좀 뉘우쳐보아야 아니 하느냐. 여남은 개쯤 써보고서 시 만들 줄 안다고 잔뜩 믿고 굴러다니는 패들과는 물건이 다르다. 2천점에서 30점을 고르는 데 땀을 흘렸다. 31년 32년 일에서 용대가리를 떡 꺼내어놓고 하도들 야단에 배암꼬랑지커녕 쥐꼬랑지도 못 달고 그만두니 서운하다. (…)" [조선중앙일보](1934.7.24~8.8)「오감도 작자의 말」中7-같은 폐결핵 환자인 김유정한테 동반자살을 권했는데 거절당했음.(신기한건 이상이 사망하고 김유정도 1달 채 되지 못해 사망함)8-이후에도 다방 여러개 운영했고, 차례대로 [つる, '학'], [69](그 69맞음), [むぎ, 보리]를 운영했으나 전부 다 망함"하늘에서 얼마라도 좋으니 왜 지폐가 소낙비처럼 퍼붓지 않나? 그것이 그저 한없이 야속하고 슬펐다."이상, <날개 中>9-이전에 알고지내던 변동림과 결혼후 새출발을 하려고 변동림과 구본웅(*이상의 아주 친한 친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새벽 열차에 몰래타서 갔으나 매우크게 실망하여, 은둔하며, 건강이 나빠짐."나는 참 동경이 이따위 비속(卑俗) 그것과 같은 물건인 줄은 그래도 몰랐소. 그래도 뭣이 있겠거니 했더니 과연 속 빈 강정 그것이오."이상, <김기림에게 6 中>"...(내야말로 동경(東京) 와서 쓸데없이 담배만 늘었지. 울화가 푹― 치밀을 때 저― 폐(肺)까지 쭉― 연기나 들이켜지 않고 이 발광(發狂)할 것 같은 심정(心情)을 억제하는 도리가 없다.)...(여기는 동경(東京)이다. 나는 어쩔 작정으로 여기 왔나? 적빈(赤貧)이 여세(如洗)―— 콕토가 그랬느니라―— 재주 없는 예술가(藝術家)야 부질없이 네 빈곤(貧困)을 내세우지 말라고. 아― 내게 빈곤(貧困)을 팔아먹는 재주 외(外)에 무슨 기능(技能)이 남아 있누. 여기는 간다쿠 진보초(神田區 神保町), 내가 어려서 제전(帝展) 이과(二科)에 하가키 주문(注文)하던 바로 게가 예다. 나는 여기서 지금 앓는다.)"이상, <실화 中>*이상은 이때 주영섭에게 편지를 보내 숙박 편의를 봐달라고 했으나, 방이 너무 좁아서 주영섭은 방이 더 넓은 김병기 화백에게 이상을 재워달라고 했음.*김병기 화백은 1916년 생으로 2022년 3월 1일 향년 105세로 작고하셨음."“빗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 이상(李箱) 시인의 제일성이었다. 주인이 양보한 침대 위에서 일어나 아침 인사로 건넨 첫마디, 바로 빗방울 소리를 헤아리느라고 잠잘 수 없었다는 것이다. 빗방울 소리 때문에 잠잘 수 없었다! 도쿄 김병기 아파트에서의 일이었다.(...)드디어 이상 시인이 왔다. 첫인상으로는 나이 많은 노인이 들어오는 줄 알았다. 실제 나이는 30살도 되지 않았다는데 50살이 넘은 것처럼 보였다. 환자처럼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게다가 몸에서 냄새도 났다. 시인에게 침대를 양보하고 나는 마루 바닥에서 잤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문제의 ‘빗소리’ 이야기를 했다. 하기야 내 방이 1층이었으니 빗소리가 잘 들렸을 것이다. 어쩌면 시인이 살았던 주거 환경과 많이 달라 빗방울 소리에 민감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렇지, 남의 침대를 양보받고 내뱉는 인사말치고는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시인다운 발상인지도 모른다."직접 이상을 본 김병기 화백의 회상.-한겨레<한세기를 그리다-101살 현역 김병기 화백의 증언>10-이후 폐결핵이 악화되었고 폐인처럼 지내다가 수상해보인다는 이유로 1937년 3월에 니시간다 경시청 경찰서에 수감당함.11-병보석으로 1달만에 풀려나긴 했으나 골초인데다가 이미 폐병은 심각할 정도로 악화된 상태. 결국 4월 17일 동경시 본향구 부사정 1번지 동경제국대학 의학부 부의원에서 27세로 요절."귀에 가까이 대고 ”무엇이 먹고 싶어?“ ”셈비끼야의 메론“이라고 하는 그 가느다란 목소리를 믿고 나는 철없이 셈비끼야에 메론을 사러 나갔다. 안 나갔으면 상은 몇 마디 더 낱말을 중얼거렸을지도 모르는데…… "아내 변동림, 「이상(理想)에서 창조된 이상」(1986.8)"6,7인이나 낯모를 사람들이 둘러앉은 곁에서 화가 길진섭이 석고로 상의 데드마스크를 뜨고 있다. 굳은 뒤에 석고를 벗겼더니 얼굴에 바른 기름이 모자랐던지 깎은 지 4,5일이 지난 양쪽 뺨 수염이 석고에 묻어서 여남은 개나 뽑혀 나왔다. 그제야 ‘정녕 이상이 죽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김소운, 「李箱 異常」, 『하늘 끝에 살아도』, 동아출판공사, 1968"오빠 가신 지 서른 해가 된 오늘날, 유물 중에서 가장 찾고 싶은 것이 있다면 오빠의 미발표 유고와 데드마스크입니다. 오빠가 돌아가신 후 임이 언니는 오빠가 살던 방에서 장서와 원고뭉치, 그리고 그림 등을 손수레로 하나 가득 싣고 나갔다는데 그 행방이 아직도 묘연하며, 오빠의 데드마스크는 동경대학 부속병원에서 유학생들이 떠놓은 것을 어떤 친구가 국내로 가져와 어머님에게까지 보인 일이 있다는데 지금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어 아쉽기 짝이 없습니다."김옥희, 「오빠 이상」"반년 만에 상을 만난 지난[1937년] 3월 스무날 밤, 동경 거리는 봄비에 젖어 있었다. (…) 상의 숙소는 구단시타(九段下 : 동경 중심부에 있는 오피스 지역) 꼬부라진 뒷골목 2층 골방이었다. 이 ‘날개’ 돋친 시인과 더불어 동경 거리를 만보하면 얼마나 유쾌하랴 그리던 온갖 꿈과는 딴판으로 상은 ‘날개’가 아주 부러져서 기거도 바로 못하고 이불을 둘러쓰고 앉아 있었다. 전등불에 가로 비친 그의 얼굴은 상아보다도 더 창백하고 검은 수염이 코밑과 턱에 참혹하게 무성하다. 그를 바라보는 내 얼굴의 어두운 표정이 가뜩이나 병들어 약해진 벗의 마음을 상해올까 보아서나는 애써 명랑을 꾸미면서 “여보, 당신 얼굴이 아주 피디아스(Phidias)의 제우스 신상 같구려.” 하고 웃었더니 상도 예의 정열 빠진 웃음을 껄껄 웃었다. 사실은 나는 듀비에의 「골고다」의 예수의 얼굴을 연상했던 것이다. 오늘 와서 생각하면 상은 시로 현대라는 커다란 모함에 빠져서 십자가를 걸머지고 간 ‘골고다’의 시인이었다."김기림, 「고 이상의 추억」(1937.6)<센비키야(千疋屋), 아직도 운영중이며 고급과일 매장으로 매우 유명함><이상이 먹고싶다고 한 센비키야의 머스크 멜론. 그러나 죽기 직전 맛보지 못한채로 요절하고 말았음.>레몬이라고 잘못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명백하게 아님. 김병기 화백과 아내였던 김향안(=변동림, 재혼해서 개명하였음)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 해줌."김환기(변동림이 재혼한 사람) 사후에 김향안은 ‘금기사항’이었던 이상에 대하여 증언하기 시작했다. 내용 가운데 하나는 임종 때 이상의 마지막 요구사항에 대한 것이었다. 시인이 요구한 마지막 물건, 기왕에 알려진 것은 ‘레몬’이었다. 하지만 김향안은 이를 ‘멜론’이라고 수정했다. 나는 이 점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멜론이면 어떻고, 레몬이면 어떤가. 김환기가 세상을 뜨자 하는 말이 겨우 ‘멜론’인가. 그 뒤부터 나는 김향안을 만나지 않았다.”김병기 화백의 회상.-한겨레<한세기를 그리다-101살 현역 김병기 화백의 증언>12-이후 아내 변동림에 의해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혔지만 6.25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면서 흔적마저 찾을 수 없게 됨."묘지명이라. 일세의 귀재 이상은 그 통생의 대작 「종생기」 1편을 남기고 서력 기원후 1937년 정축 3월 3일[음력] 미시(未時) 여기 백일 아래서 그 파란만장(?)의 생애를 끝막고 문득 졸(卒)하다. 향년 만 25세와 11개월. 오호라! 상심커다. 허탈이야 잔존하는 또 하나의 이상 구천을 우러러 호곡하고 이 한산 일편석을 세우노라."이상, <종생기 中>"그의 취미에 있어서나 성행(性行)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그의 인생관, 도덕관, 결혼관, 그러한 것에 있어서도 우리는 보통 상식인과의 사이에 적지 않은 현격(懸隔)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의 사상을 명백하게 안다고 나설 사람은 그의 많은 지우 중에도 혹은 누구 하나라도 없을 것이다. 그의 참마음을 그대로 그의 표정이나 언동 위에서 우리는 포착하기가 힘들다."박태원, 「이상의 편모(片貌)」(1937.4.26)*(조선일보의 잡지 월간조광 1937.6.01도 있음.)- - 친구 구본웅 이야기 - - -삽화가 이승만이 그린 <이상과 구본웅>큰키에 까치머리, 망토와 지팡이를 짚은게 이상임. 둘은 아주 친해서 늘 저렇게 어울려 다녔는데 문화계쪽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정도 였다고 함. 위 그림에서도 이상은 구두를 신고 있는데 항상 백구두를 신고다녔다고함. 그러나 패션에는 무관심해서 눈에 보이는 아무 옷이나 걸치고 다녓음13-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인데 이상은 경성공업고등학교 때부터 필명을 생각해놨음.지인들 말에 따르면 구본웅이라는 친구가 졸업선물로 준 화구상자가 오얏나무(李) 상자(箱)로 되어 있어서 그렇게 지었다고 함“보고도 모르는 것을 폭로시켜라! 그것은 발명보다도 발견! 거기에도 노력은 필요하다. 이상(李箱).”『경성고등공업학교 1929년도 졸업기념 사진첩』 말미에 써진 비망록..*이때는 작가로 데뷔 하기 전."김해경이라는 본 이름이 이상으로 바뀐 것은 오빠가 스물세 살 적 그러니까 1932년의 일입니다. 건축공사장에서 있었던 일로 오빠가 김해경이고 보면 ‘긴상’이래야 되는 것을 인부들이 ‘이상’으로 부른 데서 이상이라 자칭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깁니다."김옥희, 「오빠 이상」(1964.12)*실제로는 이미 예명을 정해놨었지만 본격적으로 쓴건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발표 시작 후 였음.14-이상에게는 구본웅이라는 정말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이상만큼 천재적이었으나 꼽추라는 이유로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지 못했음.15-구본웅의 어머니는 산후통으로 사망했고 이후 아버지가 재혼하게 되는데, 이 재혼한 사람이 이상의 아내, 변동림의 언니(변동숙, 여동생과 26살 차이)임.즉, 이상은 구본웅의 친구이자 이모부가 되는 셈...16-이상과는 4살차이나 나지만, 걸어서 5분 거리에 살았던 데다가, 초등학교도 같이 다녔을 정도임. 그러나 가정형편은 서로 반대였는데, 구본웅의 아버지는 사업가로, 부유한 집안출신임.17-이상의 다방이 전부 망하고 극심한 경제적 궁핍에 시달릴때 이상이 취직해있던 곳이 바로, 친구 구본웅의 '창문사' 였으며 여기서 이상, 박태원, 구본웅이 구인회의 <시와 소설>을 창간함.<1935~36년 절친 구본웅의 부친이 경영하던 인쇄소 겸 출판사 창문사의 <아동세계> 편집부 시절 이상. 도쿄로 오기 직전 말년의 모습>(왼쪽부터, 이상, 구보, 김소운)(깨끗한 버전)18-구본웅 또한 이상만큼은 아니더라도 오래살지 못하였는데 한국전쟁 중 영양실조와 폐렴으로 아들과 새어머니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47세로 사망하고 말음.(다행히 자손들은 현재까지 남아있는데, 발레리나 강수진이 구본웅의 외손녀임.)구본웅이 그려준<우인상>(친구의 초상)에 그려진 '이상'피골이 상접해 있는데다가 골초인게 실제로 이상의 특징을 잘 반영한 그림이라고 볼 수 있음.자신이 직접 그린 이상의 <자화상>내적 감정을 표현하였다고 함.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이상도 그림쪽으로 상당한 소질이 있었음."비대칭 구조의 얼굴에 안구가 없는 한쪽 눈, 눈밑에 흐른 눈물 자국, 함몰된 정수리 등이 당대 첨단 예술사조인 표현주의와 맞닿아 있다는 평이다."(<이상평전>, 김민수 지음)19-이상이 그 당시 기준으론 키가 매우컸고, 구본웅은 곱추라 키가 작았는데, 이로 부터 나온 일화가 있음.이승만이 구본웅, 이상과 함께 술집에 가다가 소설가 박종화('운수 좋은 날'을 쓴 현진건이 박종화의 사돈)를 만나게됨이 박종화 소설가도 그 키 작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이상이 박종화와 구본웅 사이에 껴서 걸어가고 있었음이를 본 이승만이 '山'를 떠올려 이상에게 전해주니"우리 모습이 마치 '뫼 산'자와 똑같군!"이라며 크게 웃었다고 함.구본웅과 이상-------------어쩌면 이상이 별로 행복했던 기억이 많지 않았던 젊은 시절을 보내고도 몇몇 유쾌하고 거침없는 작품들과 언사를 기록상에 남길 수 있었던건친구였던 구본웅의 존재와 박태원, 김유정, 김기림등의 구인회 친구와 동료들의 영향이 컸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이상임
작성자 : 격세와요격세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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