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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할일 ㅈ도없는 분들을 위한 단편

ㅂㅂㅂ(118.216) 2009.07.09 01:31:46
조회 88 추천 0 댓글 0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생길 수 있는 일\'

#1.
"야이 새끼야! 니가 잘했냐 그래서?"
"뭐? 어따대고 새끼? 새끼?"
우당탕. 쿵.

새벽 1시. 며칠 전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던 윗집에서 결국 싸움소리가 들렸다. 온몸이 부스스한 기분으로 막 청한 잠이 싹 달아나버린 나는 가만히 누워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부부싸움이 으레 그렇듯 시답잖은 언쟁으로 시작됐을 법한 저 둘의 싸움은 결국 예전부터 쌓여온 오랜 잘잘못을 끄집어 내어가며 감정싸움으로 변해버린 듯 했다.
\'싸우는 건 좋은데, 이놈의 아파트는 방음이 뭐 이런..\'
부실한 층간 구조물 사이로 약 30분간 더 들려오던 그 소리들은 결국 여자의 흐느낌으로 변해 홀로 잠을 청하던 홀애비 방을 가득 채워 놓고는 한 밤의 청승으로 마무리 되었다.

다음날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윗집 여자와 마주쳤다. 밤새 울었는지 퉁퉁 부은 얼굴을 한 대략 30대 초 중반으로 보이는 그 여자는 직장을 다니는지 말쑥한 정장 차림이었다. 본의 아니게 그들 부부의 세세한 과거사를 알아버린 나는 왠지 재미있는 기분이 들어 그 여자를 흘끔 쳐다봤다. 내 눈길을 느꼈는지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여자가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어제 많이 시끄러우셨죠."
"아..뭐,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죠."
"죄송해요. 주의할게요."

주의한다는 여자의 말과는 달리 부부싸움은 몇 일을 두고 이어졌다. 그때마다 나는 잠을 설치며 \'아 새끼들 존나게 싸우네. 여자 이쁘장하더만 걍 져주지\' 내일은 조용히 좀 하라고 꼭 말해야지 생각하며 싸움이 그치길 기다렸다가 잠이 들었다.

윗집 여자와는 가끔씩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는데 그때마다 퉁퉁 부어있는 여자에게 \'잠 좀 잡시다\'라고는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밤새 싸우고도 다음날 출근하겠다고 말쑥하게 차려 입고 있는 여자가 안돼 보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세련된 정장녀에게 약한 내 취향이 더 큰 이유였다. \'뭐라고 말을 붙이면 좋을라나\'라며 머리를 굴리다 보면 어느새 엘리베이터는 1층에 도착해 문을 열어버리고 여자는 창피한 듯 빠져나가 버렸다. 자신의 하얀색 소나타에 오르는 여자를 보며, 실은 차 문 밖으로 미처 접어 넣지 못한 그녀의 연갈색 스타킹이 감긴 종아리를 보며 애매한 아쉬움이 들곤 했다. 물론 \'머 어쩌자고\'라며 담배를 물고 출근 버스를 기다리는 게 전부였지만.

하루 또 잠잠하더니 이번에는 여자의 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남자 목소리는 없고 일정한 리듬의 여자 목소리만 들리는 걸 보니 부부싸움에 대한 화해의 의미로 그 동안 밀린 숙제 중인가 보다. 내일부터는 시끄러울 일 없겠네. 잠을 청하는데 왜인지 잠이 안 온다. 여자의 낮은 신음소리와 낮에 본 그녀의 말쑥한 차림, 그리고 남편 허리 춤에서 놀아나고 있을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뒤섞이자 잠이 말끔히 사라졌다. 잠 좀 자자 새끼들아..라며 담배에 불을 붙이는데 묘한 기분이 밀려온다. 나도 장가가야 되는데. 그럼 나도..


다음날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평소와 달리 멀쩡한 그녀의 얼굴을 보자 왠지 얄미운 생각이 들었다.

"저.. 이제서야 드리는 말씀인데, 이 아파트가 방음이 좀..."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생글거리며 그녀가 말했다.

"죄송해요. 밤마다 시끄러우셨죠."
"아니 그렇다기보다..."
"죄송해서 어쩌죠. 이젠 주의하겠습니다."
"아니 두분 싸우시는 소리도 소리지만..."
"네?"

앞으로 떡 칠 때도 주의하라고.

"아니요. 뭐..."  

젠장, 뭐라 그러지? 괜히 말 꺼냈나.

"아, 쿵쿵거리는 것도 시끄러우셨죠. 죄송해요."
"..뭐..네. 아니 괜찮아요."
"정말 죄송해요. 앞으론 정말 주의할게요."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각자 갈 길을 가는데 어젯밤의 그 묘한 기분이 다시 밀려왔다. 진하지 않은 화장에 하얀 얼굴. 어깨길이의 단발머리. 적당히 가슴이 파인 옅은 초록색의 얇은 니트에 회색 카디건과 핸드백을 한 팔에 걸고, 엉덩이 선이 드러나는 아이보리색 정장치마를 입은. 그 밑으로 내려온 도톰한 종아리와 까만 하이힐. 연신 죄송하다고 말하던 반짝거리는 입술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어떤 놈인지 얼굴이나 함 보자. 남편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몇 살이나 먹었을라나. 힘은 좀 쓰나. 허릿심은 좀 쓰는 거 같던데. 돈은 잘 버는 놈인가. 묘한 기분이 질투인가 하는 생각이 들자 \'에이 미친놈\'이라는 생각이 함께 밀려왔다.
\'니가 발정이 나긴 났구나. 엄한 여자보고 침 흘리지 말고 임마..\'
오늘 퇴근하고 안마나 한번 다녀 와야겠다.



퇴근길에 친구와 동네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그 여자 얘기를 했더니 단박에 미친놈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뭐랬냐? 그냥 이쁘더라고."
"근데 왜 밤에 잠을 못 자는 건데?"
"너 같으면 떡소리가 쌩짜로 들리는데 잠이 오냐?"
"잘됐네. 딸이나 함 잡고 자."
"그야 이미.."

라고 말하다 통로 건너 옆자리를 보니, 이런 니미럴. 그 집 부부다. 들었나? 뱉은 말을 주워담으려 큰소리로 말했다.

"술이나 처먹어"
"것 봐 임마. 지랄하지 말고 안마나 가자. 넌 그거밖에 없다."
"아..안마는 무슨. 술이나 먹어."
"안마 싫으냐? 그럼 딴 데 가던가."
"아, 시끄럽다고."

옆자리가 신경 쓰였다. 제 할 말 하기에 바쁜 남자는 우리 테이블에 관심도 없고 여자만 우리 쪽을 힐끔 본다. 들었나? 젠장. 이사가야겠구나. 아니지. 내가 창피할 게 아니지. 술기운인지 우리 얘기를 들은 건지 발개진 얼굴로 우리 쪽을 보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가볍게 눈인사를 하는 여자의 얼굴이 피식 웃었다. 못 들었구나. 아닌가? 듣고도 저러나? 저년도 정상이 아닌가?? 뭐야... 어쨌거나 어디 갈까를 외치던 친구 놈에게 이상한 호기가 생겨 큰소리로

"야, 내가 이번에 맡은 피티만 잘 마치면 작년 연봉쯤 한 달 만에 들어온다."
"갑자기 뭔 개소리야. 피티를 하던지 팬티를 팔던지 어디가 좋으냐고"
"아니 닥치고 그때 되면 내가 쏠 테니까 오늘은 술이나 먹으라고"
"그건 그때 일이고, 너 오늘 밤도 남의 집 여자 섹소리 들으면서.."
"쫌 닥쳐 새끼야!"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아까의 일을 되짚어봤다. 뭐야 그 표정은. 비웃는 건가. 들은 거야 못 들은 거야. 남자새끼 별로 못 생겼더만. 어떻게 꼬신거지. 돈을 잘 버나? 아니지. 그럼 왜 이런 아파트에… 때맞춰 여자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들을테면 들으라고 작심한 듯 했다.

"아...아..."

그 소리에 맞춰 나도 한숨이 새어 나온다. 아...아...미치겠다. 내일은 진짜 안마라도 가야지.



#2.

"넌 우리 남편처럼 위에서 무겁게 눌러 주는 게 좋아. 특히 지금처럼 뒤로 할 때 탁탁 쳐 주는 게 너무..아.."

북한산 자락의 어느 모텔. 지금 내 허리 아래 그녀는 고양이처럼 웅크려 있다. 이런 관계도 벌써 한 달이 넘었다. 회사에서 만나 결혼한지 5년이 갓 지난 남편은 그냥 무덤덤한 사이라고 했다. 자기는 아직도 남편과의 잠자리를 원하지만 남편은 이제 시들하단다. 그때도 남편이 바깥으로만 도는 것 때문에서 대판 싸운 거라고 했다. 그러다 정말 오랜만에 가져보는 잠자리였는데 그 소리를 내가 들은 거고 그 소리를 들은걸 얘기하는 나를 그날 술집에서 이 여자가 들은 거다. 그래서 그날 밤 남편과의 잠자리에서는 목소리에 신경 쓰며 소릴 질렀단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술기운이었는지 누가 자기 신음소리를 듣고 있다는 게 묘하게 흥분됐었단다. 역시 이년도 정상은 아니었어. 혼자 중얼거리며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데 그녀가 말을 이어간다.

"그날 친구랑 안마 갔었어?"
"안 갔어. 방에서 니 목소리 듣고 있었다니까."

깔깔거리며 그녀가 돌아눕는다.

"좀만 쉬자"

쉬긴 뭘 쉬어. 힘든 건 난데. 그리고 난 아직..

"너도 여기 누워"

그녀는 이런 식이다. 처음으로 층간 소음 문제가 아닌 주제로 말을 붙인 것도 그녀였다.

"뭐, 이제는 남편이랑 싸울 일 없어서 좋긴 한데 주말마다 이렇게 등산 간다고 나오는 것도 힘들다."
"그냥 우리 집으로 오라니까."
"안돼. 미쳤어."

미친거지.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윗집 사는 남의 마누라와 이렇게 주말마다 섹스를 하겠는가. 아직도 나는 품 안에 이 여자가 실감이 나질 않는다. 우리가 이렇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처음 그녀를 향한 내 감정은 섹스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예쁜 여자를 발견한 수컷의 본능적 호기심이었을 뿐.

술집에서 그들 부부와 마주쳤던 다음 날 아침, 밤새 한숨도 못 잔 나는 불쾌한 기분으로 \'오늘은 진짜 한마디 해야겠다\'라고 생각하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웃으며 인사하는 그녀를 보자 머릿속이 엉클어졌다.

"안녕하세요"
"예..안녕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올라타 숫자판만 멀끄럼히 바라보는데 그녀가 불쑥 말했다.

"요즘 준비하시는 피티 때문에 밤 새셨나 봐요."

내가 그거 땜에 밤 샌 게 아니라...뭐? 이런 썅. 다 들었구나.

"아..예...뭐..."
"큰 프로젝트인 거 같던데 고생하시네요."

어디까지 들은 거야.

"아닙니다 별로.."
"저희 때문에 많이 불편하셨겠어요. 인사라도 드려야 할 텐데."
"괜찮아요."

뭐가 불편하다는 거지? 무슨 인사? 밤마다 인사해 놓고. 근데 난 왜 아닙니다. 괜찮아요. 이 말 밖에 못하는 거야.

"항상 괜찮다고만 하시니까 저희가 더..."
"동네 주민끼리 그럴 수도 있죠 뭐."

...이게 뭔 개소리야. 시선을 바닥으로 내려 소리없이 웃던 그녀가 다시 말했다.

"괜찮으시면 가시는 길까지 제 차로 가세요. 지하철역에 내려드리면 되.."
"아뇨. 전 버스 타요"
"아,네..."

이게 아닌데. 그 날 따라 엘리베이터는 엄청나게 느렸다. 문이 열리자 한시라도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황급히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전..."
"네."

버스정류장 구석 벤치에 앉아 줄담배를 피웠다. 병신아..에이..병신... 그녀의 마지막 \'네\'라는 짧은 대답이 차갑게 느껴졌다. 그럼 그렇지. 니가 무슨. 이러다 장가라도 가겠냐. 그녀의 차가 버스 정류장을 휑하니 지나쳐갔다. 무심히 앞만 보고 운전하는 그녀를 보자 마치 죄를 지은 느낌이었다. 내가 뭘 잘 못했지. 난 피해자인데. 그날은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안 잡혔다.



"안마 같은 데 자주 가?"
"아냐. 그날 그 새끼가 갑자기.."
"우리 남편도 그러겠지?"
"모르지..남자들은..."
"너도 가긴 갔구나?"
"아니라니까!."

키득거리는 그녀를 보며 약간의 무력감이 들었다. 항상 주도권은 그녀가 쥐고 있었다. 만나는 시간. 장소.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 그리고 전화하는 것까지. 나이가 많아서 그런가. 결혼을 해서 그런가. 그녀는 어른이고 난 어린애 같았다.

"내가 어디가 그렇게 이뻤어?"
"뭔 소리야?"
"그러니까 친구한테 내 얘기한 거 아냐?"

그녀가 예쁜 건 사실이지만 꼭 그래서 그런 건 아니다.

"원래 남자들은 그런 얘기 자주 해"
"아무 여자나 그렇게 술 먹으면서 얘기하고 그래?"
"누가, 내가?"
"아니. 남자들."
"못생긴 여자는 안 해"
"뭐야...그게."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돌아 눕는 그녀. 남편은 어떨까 하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녀는 모든 것이 남편과 연관되어 있었다. 우리 남편은...우리 남편도... 우리 남편처럼. 그래서 그런지 그녀와의 첫 섹스를 가졌을 때도 소위 말하는 정복감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정복당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토록 바라던 일이었건만 내가 도리어 당한 느낌. 순간 예전의 그 질투심 같은 기분이 다시 올라왔다. \'왜. 니네 남편도 다른 여자 얘기 할까봐?\'라고 쏘아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녀에게 맞추지 않으면 언제라도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나를 항상 조심하게 했다. 모든 주도권은 그녀의 것이었다.

"그만 가자. 늦겠다."

난 아직 마무리도 못했는데.



#3.
첫 섹스 이후, 일부러 시간을 맞춘 것은 아니지만 거의 매일 아침 그녀와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다. 자기 차로 태워주겠다는 말은 없었다. 다만 엘리베이터 안에서 자기 옷이 어떤지 봐달랜다거나 내 넥타이를 고쳐 매어주곤 했었는데 그마저도 15층에서 1층까지의 1분 남짓한 시간이 전부였다. 문이 열리면 인사도 없이 앞서 나가는 그녀를 보며 애가 타는 건 나였다. 이런 기분은 그녀가 차를 태워준다고 얘기한 그 날부터 거의 매일 아침마다 느껴온 것이었다. 그녀의 호의를 거절한 그 날 밤, 그들 부부의 라이브를 들으며 \'내일은 꼭 그 차를 타고 출근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난 그녀 앞에서 여지없이 얼어붙었다. 그리고 의례적인 인사만을 하고는 사라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자책했다. 매일 밤 그 집의 부부싸움 소리를 기다렸지만 돌아오는 것은 그녀의 신음소리였다. 그 소리가 멎을 때까지 난 잠들 수 없었고 그런 상황에 화가 났지만 이제는 그녀에게 조용히 하라고 말할 수 도 없었다. 얼마 안 가 그녀의 신음소리는 들려오지 않았지만 여전히 나는 잠들지 못했다. 침대를 뒹굴며 머리를 쥐어짜내어도 그녀에게 건넬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요즘은 조용하시네요. 남편 분 출장 가셨나 봐요. 저 피티 잘 끝났어요. 차 좀 태워주세요. 뭐 이따위의 말이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럴수록 늘어가는 건 안마방 출근 도장뿐 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퇴근 후 안마방을 거쳐 집을 향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그 차를 탈 수가 있을까. 다리에 깁스라도 하고 불쌍하게 보여 볼까. 내가 지하철만 타고 다녔어도. 지금이라도 나 지하철 탄다고 말해 볼까. 이런 생각을 하며 걸어가는데 저만치 가는 그녀가 보였다. 그냥 먼저 보내고 천천히 갈까 생각하다 어느새 빠르게 걷고 있었다. 발소리가 커졌다. 거의 따라잡았을 즈음 그녀가 뒤를 홱하고 돌아본다.

"아유 놀래라. 난 또 누구시라고."
"아..안녕하세요?"
"뒤에서 갑자기 발걸음 소리가 빨라져서 놀랬어요"
"죄송합니다. 먼저 올라 가실까봐."
"네? 네..."
"아니, 엘리베이터..."
"네"

그녀가 앞쪽으로 손짓을 하며 걸어 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도중에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건 기회다. 이번에 못하면 진짜 다리를 부러뜨려야 된다. 마침 그녀에게서 술 냄새가 났다.

"회식하셨나 봐요."
"네."

짧다.

"저도 술 마셨는데.."
"네?"
"아니 제 술 냄샌지 그쪽인지 모르겠어서..."
"술 냄새 많이 나요?"
"술 많이 드셨나 봐요."
"조금요. 술 냄새 많이 나요?"
"소주 냄새나요."

피식 웃는다. 나도 웃음이 새어 나온다.

"맥주 마셨는데..."
"그럼 소주 먹어요."

너무 크게 얘기했다.

"네?"
"아니 그게 아니고..."

엘리베이터가 왔다. 다시 침묵. 안돼..5층..6층..7층..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

"소주 싫어하세요?"
"...전 맥주만 마셔요"
"그럼 맥주 드실래요?"

다시 웃는다. 난 웃음이 안 나온다.

띵- . 15층. 우리 집.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가만히 서 있었다. 사실 어찌해야 할 지를 몰랐다.
이러다 문 닫히는데...

"어디서요?"

참았던 숨이 터져 나온다. 휴우.


맥주만 마신다던 그녀는 정말로 맥주만 마셨다. 다만 소주를 섞은 맥주였다. 쏘맥은 아름다운 술이다.

"우리 집 남편은 제가 술 먹는 거 싫어해요. 그래서 회식도 못하고."
"오늘은요?"
"회식을 아예 안 할 수는 없으니까."

연거푸 맥주에 소주를 부어 마시는 그녀를 보며 \'술을 참 좋아하는구나\' 생각했다. 소주병의 뚜껑을 두어 바퀴 돌려 그녀 앞에 놓으며 말했다.

"잘 드시네요."
"오늘 안 마시면 언제 또.."

무엇이 재미있는지 그녀가 웃었다. 어느새 그녀와 나란히 앉은 나는 함께 술잔을 비우며 차근차근 그녀를 살펴봤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뒤로 넘겨진 말랑해 보이는 귀와 작은 귀고리가 달린 도톰한 귓불을 지나 하얀 목덜미 아래 옷섶 사이로 젖무덤이 보였다. 술에 취해 경계를 늦춘 아랫배를 따라 살짝 말려올라 간 치마 밑에 포개어진 허벅지를 보자 머릿속이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그래 봤자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한참이나 그녀의 허벅지와 발꿈치 사이를 눈으로 훑고 있는 나를 발견한 그녀가 어린애 보듯 말했다.

"혼자 사는 것 같던데, 애인 없어요?"
"없으니까.."
"그러니까 유부녀랑 술이나 마시고 있는 거지."

내가 ‘에이씨’하며 술잔을 입에 털자 그녀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 소리가 마치 내 방으로 넘어오던 그녀의 신음소리 같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그녀의 어깨를 팔로 감아 쥐고 입술을 갖다 댔다. 쪽 소리를 내며 빠져나간 그녀는 내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그만 나가자며 일어났다.

"벌써요?"
"지금이 몇 신데.."

그녀는 벌써 계산서를 들고 걸어가고 있었다. 발기된 아랫도리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한발 늦게 그녀를 따라 나섰다. 문 앞에서 내 손을 잡아 차로 끌다시피 걸어가던 그녀가 "재밌었어요"라고 말했다. 마치 오늘이 마지막이다라는 듯이 들려 시무룩해 하는 날보고 그녀가 빙긋 웃어 주었다. 차에 올라타 그 말의 의미를 곰곰이 되씹어보던 나는 불현듯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이번에는 그녀도 피하지 않았다. 내 볼을 어루만지며 혀를 받아주던 그녀의 치마 속으로 손을 넣어 스타킹을 한참 동안 쓰다듬던 내게 그녀가 킥킥 웃으며 속삭였다.

"스타킹 닳겠다."

스타킹을 내려 그녀의 팬티 속으로 손을 넣었다. 우리의 첫 섹스는 카섹스였다.


#4.
그렇게 주말마다 만나 잠자리를 가진지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엘리베이터에서 그 둘 부부를 함께 마주쳤다. 어색한 인사와 함께 엘리베이터 뒤편 구석에 자리잡은 나는 그 남자의 뒤통수를 보며 일종의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넌 꿈에도 모르겠지. 나의 그런 졸렬한 마음을 읽었는지 그녀가 그에게 팔짱을 꼈다. 이어 그의 잔소리가 시작됐다. 일찍 좀 다니고. 지금 니가 맡은 지점에 잘 보여서 나쁠 것 없으니 신경 좀 써. 그렇다고 너무 가깝게 지내지는 말고. 그의 잔소리에 그녀는 존댓말로 네.네. 하고 대답했다. 공손한 그녀가 어색했다. 차에 오르는 그녀에게 멀리서 짧게 인사한 그는 대답도 듣지 않고 제 갈 길로 걸어갔다. 여자의 차에서 한동안 시동 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 즈음 나는 조바심이 났다. 나도 빨리 그녀처럼 유부남이 되지 않으면, 그래서 그녀와 동등한 입장이 되지 않으면 내가 지치거나 그녀가 나를 떠나버릴 것 같았다. 우리 관계를 놀리는 친구에게 니가 유부녀의 원숙미를 아느냐며 농담 삼아 얘기했지만 실제로도 만나는 여자는 모두 애송이처럼 보였다. 그 여자의 전화를 기다리는 나와는 달리 태연한 그녀의 태도와 그녀를 완전히 소유한 듯 한 그 남편이란 놈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예쁜 여자와 함께 있는 나를 그녀에게 보이고 싶었지만 누구라도 그녀는 태연할 것 같아서 적당한 여자를 찾기 힘들었다.

회사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던 어느 날 밤,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반가움인지 야속함인지 모를 기분으로 전화를 받았는데 뜻밖에도 그녀가 잠깐 만나잔다. 어디서? 내가 그리로 갈게. 어차피 동네에서는 만날 수 없으니 내가 있는 곳으로 그녀가 왔다. 도착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조용한 술집에 마주앉은 그녀의 헐렁한 원피스 속에 담긴 젖가슴을 보자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마음만 먹으면 마음껏 주무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내 것은 아니지. 주인은 따로 있으니. 뭐, 상관없나.

"나 임질이래."

임질이라면 남자들이 옮기고 다닌다는 그 병 말하는 건가? 남편이 그랬다고 하소연하려고 만난 건가? 그렇다고 굳이 이 밤에 왜. 날 탓하는 건가? 나도 요즘 섹스하는 여자는 너밖에 없는데. 뭐 어쩌자고. 난 아니야. 조용히 말했지만 그녀는 날 원망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와의 섹스에는 콘돔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녀가 몇 년 전 몸 속에 심어놓은 피임기구 덕에 그런 건 필요 없었다. 그녀는 그 기구가 생리주기를 일정하게 해줘서 빼지 않았다고 얘기했지만 나는 남편을 위해 그런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냥 너도 알고 있으라고."

뭘. 날 의심하는 거야? 범인은 니 남편이잖아. 난 너랑 밖에...안마. 내가 안마방에서 옮았나? 아니다. 나는 한번도 콘돔을 빼본 적이 없었다. 콘돔이 100% 막아주는 건 아니지만 그 정도는 무시할 만한 수준이었다. 그녀의 표정이 \'안마나 다니는 놈이 더러운 병을 옮겼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차분하게 앉아 평소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난 혼자 경멸 당하고 있었다. 마치 \'니가 범인이어야 내 남편이 결백해져\' 라고 말하듯.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울컥 화가 났다. \'왜. 혼자 피임 해가며 기다렸는데 이제 냄새 때문에 남편한테 못 대주게 되니까 내가 원망스럽냐?\'라고 소리지르고 싶었다. 이러다가는 정말 평생 이 여자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매일 밤 자다가도 남편을 기다리는 그녀를 생각하면 눈이 번쩍번쩍 뜨였다. 됐어. 그냥 따먹었으면 됐지. 남는 장사잖아. 분통을 삼키며 빨리 애인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나도 태연해 보이고 싶었다.

"자러 가자"

내 말에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손목을 낚아 채어 아무 모텔에나 들어갔다. 그녀의 가랑이를 핥으며 활처럼 휘는 그녀의 허리를 더듬어 가슴을 움켜쥐었다. 내 머리채를 잡고 있는 그녀의 손아귀가 약해질세라 더욱 세차게 핥아 올렸다. 가쁜 숨을 몰아 내쉬는 그녀 옆에 누구의 체액인지 알 수 없는 액체로 얼굴이 범벅이 된 내가 쓰러지듯 누웠다. 도망가고 싶었지만 관계를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원한다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녀의 온 몸을 핥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끈적해진 얼굴을 씻어내고 거울을 보니 눈이 발갛다. 모텔을 빠져 나와 택시에 올랐다. 피곤한 듯 품에 안긴 그녀의 가슴팍에 손을 넣어 주물거렸다. 가만히 있는다. 태연한 그녀. 반짝이며 지나치는 가로등이 멍했다.

한동안 그녀에게서 전화가 없었다. 먼저 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한 달이 흘렀다.

토요일 아침, 그녀의 전화를 받고 차를 몰아 도착한 곳에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그대로였다. 남편과는 여전히 섹스리스 상태였고, 한 달 동안 병원에 다니며 약을 먹었다고 했다. 그 동안 내가 보고 싶었다고 웃으며 내 윗도리에 손을 넣는 그녀가 허탈했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밥도 먹지 않은 채 모텔방을 잡았다. 경치 좋은 데로 놀러 가자는 그녀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방안에 울리는 신음소리가 여기가 모텔인지, 내 방인지 구별되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때가 되면 망할 놈의 피임기구도 수명이 다 되겠지. 임신했다고, 어떡하냐며 우는 그녀를 상상하며 그녀의 가랑이에 나를 밀어 넣었다. 미끌하면서 따뜻한 느낌. 체념한 듯 누워있는 그녀 위에서 나는 한참을 혼자 용두질하고 있었다.





 P.S : 응, 이걸 다 읽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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