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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마을에서 가장 예쁜 여자.txt

ㅂㄷ(211.212) 2009.06.20 22: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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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일을 마치고 새벽까지 바에서 거하게 취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문득 나도 그렇게 탄탄한 몸을 지녔던 때가 있었던가 싶다. 불과 몇 년 전 기억일 텐데, 마치 타인의 기억인양 생소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몸이 기억을 하고 있지 못한 탓이리라. 기억을 담고 있는 내 몸이 변해버렸다. 그릇이 녹슬면 안에 담긴 음식도 썩는 법이다. 난 늙고, 약해졌다.


특히나 오늘같이 야간조에 걸리는 날은 온몸의 피가 빨린 듯한 느낌이다. 이렇게 마지막 순환이 끝날 즈음엔 나도 모르게 자꾸 뒤를 돌아 등을 보게 된다. 등에 누군가가 업힌 듯한 무거움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한번 업고 나면 그가 내린 뒤에도 그 무게가 꽤 오랫동안 남는다. 술 취한 자들이 남기는 영혼의 무게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겠지. 그들 대부분은 아주 가벼운 영혼이 덜렁거릴 뿐이니. 그저 거렁뱅이 인생의 고된 무게를 내가 잠시 나눠 갖는 것일 뿐이리라.


나는 지하철의 가드로만 이십년을 넘게 일해 왔다. 가드가 하는 일은 지하철 내 각종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고, 역을 관리하며 이용하는 시민들의 안전을 수호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업무는 술에 취한 취객이 별 탈 없이 역 밖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보거나,  그렇지 못하다면 역 밖으로 쫒아내는 것이다. 심각한 부상을 입었거나, 생명이 위독해 보이는 경우 경찰에 연락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그저 역 밖으로 밀어내기만 하면 그만이다. 역 안의 평온에만 집중해야 하는 직업인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십년이 넘도록 지하철 가드로 지내지 않는다. 현장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가드는 이십대 초반부터 삼십대 중반까지 이고, 그 이후엔 실적에 따라 다양한 사무직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난 이십년이 넘도록 가드로만 일해 왔고, 덕분에 하루하루 최연장자의 기록을 세워가는 중이다. 물론 내가 이 고된 가드일을 좋아서 할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내가 지독한 경마꾼에 술고래라는 소문을 윗 선이 모를 리 없었고, 태업과 결근을 밥 먹듯이 했던 나에겐, 사무직은 커녕 여태 목이 잘리지 않은 것도 신의 가호 일 것이다.


문득 오늘을 마지막으로 이 일은 관두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더 이상 이 고된 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몇 년 째 휴가다운 휴가를 가져보지 못했다. 고용장의 복지가 형편없던 탓은 아니다. 휴가란 휴가는 죄다 일년에 한번인 체력시험 전후로 몰아 넣고, 시험으로 소진된 기력을 보충시키는데 써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시험으로 골병이 들어 몸져 누워 몇 일이고 앓아눕는 것이 내 휴가의 전부란 말이다. 감독관이 사정을 봐준 탓에 난 몇 년 째 마지막 시험만 치르고 있었고, 그 시험은 80kg 의 마네킹을 짊어지고 20분을 걷는 것이었는데, 난 그마저도 1년의 휴식을 모두 소모해야 할 만큼 아슬아슬 했다. 이젠 도저히 못한다. 오늘이 끝이다. 이러다간 언젠가 정신을 잃고 철로에 쓰러져 사방에 내 흔적을 남기고 사라질 지도 모른다.


내가 담당하는 역은 푸오필라 역인데, 도심에서 다소 떨어진 한적한 역이었다. 비교적 할 일이 적은 역을 고정적으로 담당하는 것은 업무를 줄여주려 한 윗선의 배려 덕택인데, 오늘은 유독 일이 많았다. 오전 11시부터 철로에 소변을 보려한 만취한 남자를 필두로, 무려 일곱 명의 취객을 상대해야 했다. 분명 벅차고 고된 하루였다. 간신히 역을 정리하고 내가 사는 캄피행 막차를 탔을 때는, 하루 일을 끝마친 보람 따위를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근육 세포 하나하나에 까지 깃든 피로가 나를 녹이고 있었다. 베이컨에 연기가 베어들 듯이, 내 몸에는 피로가 베어들었다.  

출고지로 향하는 마지막 차였기에 승객은 없었고, 창 밖으로 보이는 역도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잠시 눈을 붙이려 했지만 영영 못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는 공포감에 자세를 고쳐 잡았다. 버려진 몸뚱이를 처리하는 것이 또 다른 가드 녀석 이라는 건 참을 수 없다. 그들이 시체를 처리하는 법을 잘 알고 있다. 아니, 역에선 안되. 지긋지긋해.


차는 하카니에미 역을 지나 쇠르나이넨 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쇠르나이넨 . 내가 처음 가드 일을 시작했던 역이다. 나는 무려 팔년이나 이 역에서 가드를 보았다. 이 곳은 이 도시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었다. 부랑자와 거렁뱅이의 천국, 쇠르나이넨. 성범죄와 총기사고가 빈번했으며, 우범지대로 악명 높아 지대도 저렴했고, 술 값 또한 다른 어느 지역보다 저렴했다. 어쩌면 이 곳에서 일하던 시절은 내 인생에서 가장 바른 조각이었으리라. 이 곳의 문제아들이 매일 긴장의 끈을 팽팽히 당겨준 탓에, 일에만 집중하여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 이 곳을 떠난 뒤로는 급격히 나태해지고, 나약해져, 술과 경마의 늪에서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익숙한 역의 풍경은 그다지 변함이 없었다. 가드로서 이 역을 지나치는 것도 마지막이란 생각이 들어 잠시 옛 감회에 젖을 무렵, 누군가가 승강장에 쓰러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 나의 구역도 아니고, 여기서 내리면 집에 갈 일도 골치인데 외면할까 하다가, 왠지 그를 처리하는 것이 내 마지막 업무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열차 문이 닫히기 전에 잽싸게 열차에서 내리고 말았다.


“ 제기랄, 오늘 밤도 끙끙 앓겠군. 이봐, 정신 차려! ”


그의 어깨를 뒤흔들어 깨우려 하는데, 예상 외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자는 여자였다. 그것도 그저 취한 여자가 아닌, 그녀는 레나. 마을에서 가장 예쁜 여자, 레나.


마리야따 집안의 두 딸은 라티에서 가장 예쁜 자매로 유명했다. 언니 레안과 동생 레나. 둘은 닮은 듯 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아름다움을 풍겼다. 레안이 나이에 비해 보다 성숙하고, 섹시한 여성미를 갖고 있었던 반면, 레나는 동안의 얼굴 위에 인형 같은 귀여움을 흠뻑 담고 있었다. 금과 은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두 자매였지만, 남정네들은 대개 레안의 성적인 매력에 높은 점수를 주었고, 레나의 나이가 다소 어렸던 탓도 있기에, 레안은 몇 년 째 마을에서 가장 예쁜 여자로 불리었다.


명성에 걸맞게 레안의 주변에는 그녀의 미모를 소유하고자 하는 남자들이 넘쳐났고, 그녀의 미모역시 그들의 욕구를 만류할 재간이 없었다. 나는 감히 그녀를 안으려한 부류에 속할 꿈도 못 꾸었기에, 그녀의 일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으나, 확실한 것은 그녀가 한 남자와 만남을 오래 갖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녀의 남자는 수시로 바뀌었으며, 때로는 동년배를, 때로는 유부남을, 때로는 정치인을, 그녀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그 어떤 남자도 취할 수 있었던 마을에서 가장 예쁜 여자, 레안.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기억은 그녀의 목록에 이름을 올리는 남자의 수가 늘어 날 수록, 그들의 가치는 떨어져 갔다는 것이다. 그녀는 처음엔 지역에서 가장 멋진 청년들과 만났지만, 그녀를 거치지 않은 훌륭한 남자는 드물어져 갔으며, 결국 나중엔 대단치 않은 남자도 그녀를 품었다고 자랑하는 일도 생겼다. 훗날 레나의 입을 빌리자면, 그들 중 진심으로 레안을 사랑한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그들이 레안 대신 사랑한 것은 마을에서 가장 예쁜 여자의 미모였다. 아무도 미모 뒤에 가려진 레안의 본 모습에 관심갖지 않았다. 그리고 여자의 미모는, 생각보다 쉽게 질리는 법이다.


그녀는 사랑에, 아니 남자에 점점 지쳐가기 시작했다. 언제나 남자와 시간을 나누었지만, 그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했다. 그 누구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그리고 않는다는 사실이 그녀를 옥죄었을 것이다. 여전한, 혹은 날로 더해가는 그녀의 미모가 증오스러웠던 것도 그 즈음이었다. 미모로 인해 선택받고, 미모로 인해 사랑받지 못하고, 미모로 인해 버림받던 그녀는 자신의 미모와 멀어지고자 했고, 스스로 마을에서 가장 예쁜 여자의 족쇄를 풀어내는 것을 택했다.


레나가 언니의 방에서 난 비명소리를 듣고 뛰어올라갔을 때, 이미 레안은 피범벅이 되어 거울 앞에 쓰러져 있었다. 그녀는 왼편 눈꼬리부터 입꼬리까지 면도날로 스스로 얼굴을 찢어내었고, 둔탁한 날로 베어진 상처는 점점 부풀어 오르며 쉴 새 없이 피를 뿜어내었다. 레나는 구급차를 기다리며 찢겨진 반쪽 얼굴에 수건을 대고 지혈을 하려 했으나, 피는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극심한 고통에 정신을 잃고 부들부들 떨며, 과다 출혈로 죽어가는 언니를 보면서도, 레나의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가려지지 않은 그녀의 반편, 그것조차 너무나 아름다운 레안의 얼굴이었다.


구급차가 왔을 때 이미 레안은 레테의 강을 등진 뒤였다. 그렇게 그녀는 마을에서 가장 예쁜 여자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동시에 그것은 그 무게를 동생 레나에게 짐 지운다는 뜻이었다. 레나는 그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누나를 잃은 슬픔보다 그녀를 잠식했던 것은, 이제 자신이 마을에서 가장 예쁜 여자라는 공포감이었다.


내가 레나를 만난 것은 레안의 장례식이 있은 지 일주일 뒤였다. 내가 바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이미 심히 취해있었다. 날 멀찌감치 떨어져 마을에서 가장 예쁜 여자가 취해가는 것을 바라보며 술병을 홀짝였다. 바라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술 맛은 더욱 달콤해졌다.


그리고 일이 터졌다. 한 남자가 레나에게 따귀를 맞은 것이다. 그 남자는 당시 시의원의 아들이었는데, 누가 봐도 근사한 외모와 매력적인 자태를 갖고 있었기에 충분히 마을에서 가장 에쁜 여자에게 접근할 자격이 있는 남자였다. 따귀소리로 그녀에게 이목이 집중된 그 때, 바를 찬찬히 한 바퀴 둘러다 본 그녀가 나를 발견하고 내게로 다녀왔다.

“ 당신, 나의 남자가 되어줘. ”


나는 그녀의 남자는 커녕, 만남 혹은 대화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 일은, 만약 내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과 같은 일반적인 상상의 영역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순간적인 판단을 해야 했고, 나는 마치 자석에 이끌린 동전처럼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그녀에게 끌려나왔다. 글쎄, 오래된 기억을 더듬자면, 그것은 그 누구도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일 것이다.


그 날 이후 나는 그녀의 남자로, 그녀는 나의 남자로 지내게 되었다. 나는 그녀 이전의 여자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그것은 감퇴한 기억력 탓이 아니라, 실로 여자와의 아무런 교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녀는 나의 첫 사랑으로 기억되어 왔고, 여전히 마을에서 가장 예쁜 여자로 기억되어 왔다. 기억이 깊어질수록, 시간은 멀어져 갔는데, 삼십여년만에 그녀를 쇠르나이넨에서 만날 줄은. 내게 온 첫 날처럼, 그녀는 또다시 갑작스레 내 삶에 끼어들었다.


“ 레나, 레나 맞지? 레나?”

“ 레나? 그래, 어렸을 때는 레나였지.”

술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깊은 술내음에 술꾼인 나도 나도모르게 잠시 고개를 돌렸다.

“ 술을 엄청나게 마셨군. 내가 데려다 주겠어. 집이 어디지? ”

“ 집? 집 같은건 없어. 여기가 내 집이야.”

“ 여기서 자서는 안돼, 레나. ”

“ 밖은 아직 추워. 얼어 죽는다고.”

“ 하지만 여긴 안돼.”

“ 제발 날 쫒아내지 마. 그렇다면 나를 좀 재워 주겠어? 돈은 주지 않아도 되니, 제발.”

레나에겐 지난 30년 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가. 우리가 30 년 만에 만났다는 것 보다 내가 그녀를 알아봤다는 것이 더욱 놀라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장 아름답던 그녀는 그녀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아니, 그녀는 추했다. 햇볕이 강한 날엔 깊은 늪 같은 검은 눈을 살포시 찡그리곤 했다. 이제는 누런 백태가 검은 광채를 잡아먹었다. 웃음을 지어보일 땐 새하얀 치아가 빛을 튕겨내곤 했다. 이제는 검은 공백이 간데 없는 치아를 대신한다. 폭포수 같이 매끄러운 흑발을 아래로 쓸어내리던 섬세한 손이 있었다. 이제는 생기 잃은 은발이 듬성듬성 엉켜있고, 거친 손 위의 손톱은 세 개나 자리를 비웠다. 마을에서 가장 예뻤던 레나.


나는 그녀를 업고 역을 나와 걷기 시작했다. 아마도 레나는 집이 없는 듯 했고, 있다 하더라도 기억을 못하는 것 같았다. 택시를 잡아 나의 집으로 향할까 하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30년 만에 만난 옛 사랑에게 나의 집은 기꺼이 문을 열 만큼 자랑스럽지 못했다, 아니 형편  없었다. 그녀를 빈 맥주 캔 더미 위에서 재우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업고 근방의 모텔을 찾아 터벅터벅 걸었다. 술에 취한 자를 업는지라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아니면 30년의 무게가 내 등을 누르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 날도 내가 그녀를 업었지. 나는 고개를 틀어 그녀에게 물었다.


“ 레나, 나야. 날 알고 있지?”

그녀는 실눈을 뜨고 나를 힐끔 보더니, 다시 눈을 감으며 말했다.

“ 아니, 몰라.”

“ 나, 요하네스야. 기억 안나? 같은 마을에서 살았었다고, 라티. ”

“ 모르겠어. 그것보다 당신, 참 지독히도 못생겼군.”




“ 네가 제일 못생겼기 때문이야.”

그 날도 그녀는 내게 못생겼다 하였다. 나를 택한 그 날, 그녀는 만취해 내 등에 업혀 바를 나왔다. 나는 내 등 위에 반쯤 잠든 그녀에게, 왜 나를 택했느냐 물었고, 대답은 ‘내가 가장 못생겨서’ 였다.

“ 못생겨서? ”

“ 응. 바 안에 있는 남자 중 당신이 가장 못생겼기 때문이지.”

글쎄, 예나 지금이나 그녀의 말을 듣고 화가 나지 않은 것은, 실로 나는 못생겼기 때문이다. 이제는 내 스스로 내가 못생겼는지 조차 판단할 수 없을 만큼 오래 살아버렸다. 이미 익숙해져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내 추한 얼굴이 내 눈에 익기 전, 나는 못난 외모로 인해 너무나 괴로웠다.  외모 덕에 나는 평생 그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했고, 사랑을 꿈꿔보지도 못했다. 난 못생기고, 동시에 못난 인간이었다. 그녀 역시도 내게 못생겼다는 말을 한, 셀 수 없는 수 많은 사람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내가 그녀의 ‘못생겼다’ 를 기억하는 것은, 못난 외모로         득을 본 내 인생 단 한 번의 일이었기 때문이리라.


“이해가 잘 되지 않는데, 어째서 못생긴 남자를 원한거지?”


그녀의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이미 내 등 위에서 잠든 뒤였다. 난 그 뒤로도 다시는 그 것을 묻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 날 이후 나는 마을에서 가장 예쁜 여자의 남자로 지내게 되었다. 마을에서 가장 예쁜 여자의 남자로 지내는 것, 그것은 그 어떤 남자도 꿈꾸지 않을 수 없는 환상적인 일이었으나, 못난 남자인 내게는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어딜가나 나를 향한 비웃음이 끊이질 않았고, 여기저기서 내가 그녀의 놀잇감일 뿐이라는 말이 들려왔다. 그녀의 사랑은 언제나 비웃음을 샀다. 그리고 그들의 말을 일정 부분 사실이었다. 그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그녀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사랑하려고 괘나 노력했다는 것은 우리 둘만이 나눠 가진 분명한 진실이었다. 그녀는 나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했다. 나와의 만남에 충실하려 하였고, 육체적인 관계에도 적극적으로 임했다. 그러나 그녀의 노력은 내게는 어쩌면 슬픈 진실이었다. 불행히도 나는 그녀의 모든 행동 하나 하나에서 나를 사랑하려는 노력을, 동시에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진실을 읽을 수 있었다. 사랑에 빠지기 위한 노력, 그것은 사랑이란 감정에 목적이 깃들었다는 뜻이고, 동시에 그 목적은 그녀가 나를 택한 이유였다. 그것은 레안의 죽음에 대한 그녀 나름대로의 복수였다.


그 것은 마을에서 가장 예쁜 여자의 칭호를 죽은 언니로부터 물려받은 레나가 언니와 같은 진흙탕을 딛지 않겠다는 다짐이었으며, 동시에 외양과 무관한 사랑의 존재를 증명하고픈 그녀의 치기오린 오기였다. 뭇사람들이 멸시의 시선으로 그녀와 함께 있는 나를 비웃을 때마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나를 감싸안았고, 그들의 시선에 내가 상처받을 때마다 내 입술을 따스히 포개주었다. 그것은 분명히 사랑에 빠지고자 하는 그녀의 노력이었다. 하지만 단 한번도 그녀가 나를 진실로 사랑한다고 내 자신을 속이지 않을 수 있던 것은, 사랑받지 못해온 자의 육감 때문 아니었을까. 사랑받지 못함에 익숙한 나는 그녀가 나를 멸시해온 여타의 여성들과 같은 마음으로 나를 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를 사랑하지 않음은 그녀의 눈빛, 손길, 몸짓, 살갗, 미소, 떨림, 심지어 숨소리 하나하나에서 까지 읽혀졌다.

그녀의 분노, 혹은 다짐, 혹은 오기, 혹은 자기 기만, 혹은 인내, 혹은 자비는 오래가지 않았다. 젊고 아름다웠던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미인의 규칙을,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못하고 날 떠나갔다. 사랑하지 않는 자와의 사랑에 질려버린 그녀는 어느 날 바에서 만난 한 여행가와 눈이 맞아, 그 길로 빈 몸으로 마을을 떠나버렸고, 나의 옆자리와 마을에서 가장 예쁜 여자의 자리는 동시에 비어버렸다. 아무 말도 없는 갑작스런 이별이었지만, 내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별이었다.


그리고 30여년 만에 그녀는 다시 내 등 뒤로 돌아왔다. 그녀를 처음 만난 날은 삼십분도 넘게 그녀를 업고 걸어갔지만, 지금은 채 오분이 되지 않아 다리가 후들거렸다. 시간이 지날 수록 몸이 비틀거리고, 무릎이 요동치기 시작하자 불편해진 그녀가 눈을 떴다. 술이 좀 깨는 모양이었다.

“ 어딜 가는 것이지? ”

“ 이 근방의 숙박업소를 갈거야. ”

“ 좋아. 제일 가까운 곳은 여기서 삼분만 가면 되.”

“ 그래, 그곳으로 가지.”

그녀가 말한대로 따라가니 실로 한 숙박업소가 나타났다. 근처에 그녀를 내리고 허리를 펴 보니, 제기랄, 그곳은 꽤나 으리으리한 곳이었다. 번쩍이는 호텔 간판이 나를 주눅들게 하였다.

“ 저 곳이야. 저곳에서 자고 싶군. 참고로 난 한 푼도 없어. ”

“ 내게 돈이 있어.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 키를 받아오지.”

호기있게 말하고 발걸음을 옮겼으나, 주머니엔 푼돈 뿐이었다. 하루 밥 값을 걱정하는 나에게 이런 곳에 머물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너무나 힘들다. 더 이상 발걸음을 옮기기 싫다. 이 곳에 머무르고 싶다. 하지만 난, 돈이 없다.


문은 이중문이었다. 나는 첫 번 째 문을 열고 들어가 두 번째 문 사이의 공간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그곳에 털썩 주정 앉았다. 문득 저번 주에 경마로 날린 월급이 생각났다. 미안해 레나, 난 형편없는 놈이야.


그렇게 그곳에 잠시 앉았다가, 나는 다시 돌아나갔다. 그리고 30년 만에 만난 레나에게 거짓말을 하였다.


“ 방이 모두 찼다는군. ”

“ 제기랄, 그럴 리 없는데? 제길! 난 여기서 자고 싶다고!”

“ 미안, 레나. 나도 어쩔 수 없군. ”

“ 제길. 그럼 저 쪽으로 가자. 그 곳은 가고 싶지 않은데.”

술내음은 여전했지만 그녀는 이제 비틀거리면서 나마 나와 걸음을 뗄 수 있었다. 우리는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가슴이 점점 쓰려지기 시작했다.

“ 레나, 난 요하네스야. 라티에서 온.”

“ 오, 라티. 제기랄 빌어먹을 동네지. 그 곳을 언제 떠난지도 모르겠어.”

“ 네가 열 여덟살 때이지. 요하네스야, 내가 기억나지 않아?”

“ 모르겠어.”

“ 우리는 한때 사귀었던 적도 있었다고.”

“ 뭐? 훗, 미안하지만 당신 같은 사람을 사랑한 적은 없어.”

“ 그래. 맞는 말이야.”


조금 걷다보니 한 허름한 모텔이 눈에 들어왔다. 레나는 말 없이 그 곳을 손가락질 했고, 나는 그 곳으로 들어갔다. 다행이었다. 간신히 가진 돈으로 객실비를 맞출 수 있었다. 주인은 문고리가 고장났다며 키를 주는 대신, 심드렁히 객실 번호만 알려주었다.


그렇게 나와 그녀는 다시 한 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녀는 방 문을 열자마자 침대위로 드러누웠다.


“ 내게 뭘 하던지 상관없어. 단지 떠날 때 내 잠을 깨우지는 마.”


그녀는 옷을 벗으며 내게 말했다. 문득 그녀를 처음 업고 나온 날이 생각났다. 그 날도 우리는 모텔에 갔고, 그녀는 취해있었으며, 스스로 옷을 벗으며 침대에 누웠다. 다만 그녀는 잠을 방해하지 말고 사라져달란 말을 하지 않았다.

온 몸이 땀에 젖은 나는, 땀을 씻어내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얼굴과 목에 흥건한 땀을 씻어내고 손을 닦았다. 수건을 짚어들어 얼굴을 덮었는데, 축축한 수건에선 땀 냄새보다 심한 물때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하아.  아마도 이 방에 거쳐간 가난한 사랑 냄새겠지. 이 지독한 물때 냄새란.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그녀는 이미 코를 골고 있었다. 코를 고는 버릇은 여전했다. 귀에 거슬릴 정도로 크지 않은, 고요한 코골음. 나는 문득 내가 아직 그녀의 날숨 냄새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그녀를 만나 침대에 뉘인 그 날, 나는 술에 취해 잠든 그녀를 어찌할 줄 몰랐다. 키스를 하고 싶었지만 처음이기도 하고, 도무지 용기가 안나 한참을 그녀 앞에서 망설였다. 그녀의 고운 얼굴에 얼굴을 맞대도, 도무지 입술을 포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얼굴을 맞대고 쭈뼛거리고 있는데, 그녀의 날숨이 내 코로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그녀의 코로 나오는 날숨 냄새를 맡고 또 맡았다. 달콤 시큼한 알코올이 섞인 그녀의 날숨 향기는 그 어떤 향기보다 아름다웠다. 그리고 나는 그 향기를 삼십년만에 다시 떠올렸다. 나는 그녀와 얼굴을 맞대고 사랑의 냄새를 다시 느끼려 했으나, 코를 찌르는 악취만이 내 후각을 파고들었다.


사랑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의 추함은 변함없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마을에서 가장 예쁜 여자와 사랑을 평생 간직했으나, 그녀는 나를 기억조차 못한다. 그녀의 향기로운 날숨도 그녀를 떠나버렸다. 레나, 우리의 사랑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거지?  단 하나의 사랑은 이제 가물해지는 나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것인가. 나는 침대 밑에 털썩 주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뜨거운 눈물이 땀으로 적셔진 바지 위로 흘러내렸다.



레나, 마을에서 가장 예뻣던 여자, 레나. 우리 둘 중 한 명은 행복해도 되지 않았을까. 한 명 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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