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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후쿠오카 런트립 2부完 (스압)
- 관련게시물 : 다시쓰는 후쿠오카 런트립 1부 (스압)예아 실베 고로시 고맙쓰뭐 한번 갔는데 연베가거써?뭐 암튼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동료는 자고있더라.심심하니까 아침에 뛰러나감쿠로미 드레스업이 보인다 커엽일요일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러닝하는 일본인들 많았다.러닝선진국 시티런 하는데도 횡단보도 외에는 큰 불편함이 없었음.얘는 그냥 구축건물들 정말 많은데지 혼자 깔끔한 신식이라 찍어봄 별 이유없음.크게 돌지는 않았고 그냥 적당히 적당히 30분 조깅으로다시 복귀2일차는 1일차에아브라야마 전망대를 미리 선수를 쳐 갔다왔기 때문에,이번에는 널럴하게 이토시마시로 넘어가서 사쿠라이 해변가에 있는 문짝?인가를 보러 간다.거기도 나름 유명하다고 하니 지하철 타고 이동.여긴 스크린 도어가 ㅈㄴ 낮다. 지옥런 할거면 뛰어 넘어가라 하는 것 같음.쿠션이 푹신푹신해서 좋다.거 가다가 보면 지쿠젠마에바루역에 내려서이토시마 관광안내소에서 자전거를 빌려 올라가던가해변트립버스를 타고 돌던가 택시를 타고 가던가 해야한다.우리는 두다리가 튼튼하니 자전거로 선택하기전에 밥부터 먼저 먹음직원분이 영어 못하신다. 한국어도 없다. 알아서 잘 먹을 수 있도록멘치카스랑 함바그 스테이크 둘 다 맛있다.자 이제 배를 채우고 다시 관광안내소로 갔다.제비 커엽그런데...자전거가 한대 밖에 남지 않았다.전기자전거도 전부 있었는데 없었다.동료가 깊은 고심을 빠진 사이 그냥 내가 자원해서 뛴다고 했다.목적지는 왕복 23km 자전거로 50분난닝구 한다니까 미친놈인가 하는 표정으로 쳐다본다.ㅋㅋㅋ 그럴만도 하다.근데 4시간 대여료가 2천엔은 좀 너무하지 않냐따릉이 2시간 2천원 하루 무제한인데아무튼 마지막 자전거를 대여함.간바떼 하는 여성직원의 목소리가 ㅋㅋㅋ 웃음벨 반 걱정 반 같다.나이가 지긋하신 남성 직원분도 어...에...어.. 하신다.무릎 병신이었던 나에게 벌써 이런 시간까지 찾아왔다니 신이 소원을 들어주긴 하는 갑다.마지막 자전거.나는 코리안들이 다 어디 간 줄 알았지.엄청나게 힘든 정도는 아니었다만덥고 습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길이 빨리 안 나오고 처음 올라가는 길은 어디 농수로 근방으로 다녀서좀 헤맸다. 강제 트레일러닝ㅋㅋㅋㅋ도착하고 나니까 땀이 엄청나게 흐른다.아 운동 겁나 잘된다.밥먹고 바로 뛸라니까 죽겠네날씨가 그렇게 좋지 않았지만 가서 구경하는 것 만으로도 개꿀여기도 결혼사진 스팟 장소로 그렇게 유명하다고 한다.요기 앞에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는데,나는 아이스커피 사달라고해서 아이스커피 사먹었다.그렇게 맛있을 줄 몰랐네.잠시 시간을 보내고 나니 갑자기 현타가 왔다.뛰어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ㅋㅋㅋ자 다시 돌아서 드가자 드가자올땐 여유롭게 간다고 선언 후좀 천천히 달렸다. 시간을 앞에서 많이 아꼈기 때문에 돌아올 때는 여유로웠다.중간에 센트럴 파크라는 공원에서 초등학생? 소학생? 애들이 열심히행사하면서 먹을 것을 팔고 있었다.여기서 하와이안 블루 뭐시기 하나 사먹었다.레몬에이드 + 시럽 맛 + 파랑색 색소라 그냥 저냥이었는데먹을만 했다. 당 충전이 굉장히 필요한 시기라 군말없이 다 먹었다. 자전거 갖다 넣으려고 복귀하면서 오카에리 하면서 들어오니까안내소 직원 할아버지가 존나 놀랐는지 몇 키로 나왔냐고 인증 좀 해달라고 해서23km 나온거 보여줬다.몇시간 걸렸냐고 물어봐서 니지간이라고 말씀드렸는데... 니지간데스까라 이러더니벙찐표정으로 쳐다봤다. 아마 안내소서 뛰어갔다 온 사람이 없었나?아무튼 숙소로 복귀 후 근처 장어덥밮집 입개르데리야끼소스가 달지 않아서 정말 좋았다. ㅎㅎ미역문어는 한국인 인기메뉴라는데,굳이 인기메뉴까진 아닌 것 같다. 맛은 있다.동료는 진득해서 싫다고 했다.그리고 이날은 하카타 텐진거리 잠시 돌아봤는데, 사진찍을 만한 것도 없고 한국인들 목소리만 들렸다.다 여기 숨어있었구만그냥 가다가 찍은 애니타임 피트니스와 세븐일레븐그렇게 다음날로 넘어가면 뭐해 안뛰고뛰어야지 널럴하게 1시간 잡고 돌아댕겼다.동료는 낑낑거리면서 잔다. 나는 그거 안하니까 얼른 도망나왔다.일본도 출근시간의 트래픽 잼은 똑같다. ㅋㅋㅋㅋㅋㅋ 동조선 클라스 답다걍 똑같음.다시보는 아침 오호리 공원아침에 와도 뛰는사람 엄청 많다.오호리 공원 스타벅스에서 우리를 처다보는데"재네 더운데 왜뜀 ㅋㅋ" 이런 표정이다.인사하는 거북이쟝일본도 그런 날씨에 어떻게 이런 올드카들이 즐비한지 모르겠다.그 해풍때문에 프레임 안썩나? 하고 맨날 생각함.이제 정들었던 숙소의 체크아웃 시간이 다 되어서다시 하카타로 넘어갔다.일본 애니메이션 IP산업은 정말 대단하다.몇십년 아니 몇백년 우려먹을 수 있겠지?나는 운붕이니까 스포쓰 매장갔다.실내에 몬도트랙을 깔았다. 미틴넘들대단하누..디나3 디나엘3 패스트 뭐였지푸마 이제 싫어 안신어무지카페서 음료랑 디저트 시키니까직접 갖다 주신다.여기서 시간 좀 노닥거리다가 뭐 말딸인가 딸딸인가 하는 거 좋아하는 지인들이 있길래매장 좀 둘러보는데중고 피규어중에 저렴한건 아에 천원단위다. (백엔단위)집에서 이거보고 뭔놈의 처자들이 뿔이 달렸냐고 여쭤보신다.말 귀라고 하니까 저게 어떻게 말귀냐고 하신다.우마무스메 피규어는 우리집에선 그냥 뿔달린 인형이다아 ㅔ.....이제 시간 다돼서집가야지국내여행도 자주 돌았지만해외에서 이렇게 달려본건 두 번째다.앞선 여행에서 테스트배드로 뛰어보니까 너무 좋아서 후쿠오카는 얼마나 괜찮은 가 했더니ㅅㅌㅊ였다. 런붕이들 죄다 가서 뛰고와라.피겨는 벌써 나눠주는 중. 일단 내 무릎 살려낸 화타 코박쭉코치 하나 줌.쓰고나니까 ㅈㄴ 재미없네 이게 다 도파민 빠져서 그래完
작성자 : 리복충아님고정닉
카슈미르 분쟁의 새로운 도전자 - 1
[시리즈] 카슈미르 · 카슈미르 문제의 근본에 대하여…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시작되는 1947년부터 종전되는 1949년 사이, 인도 바로 옆에 있는 매우 거대한 국가에서는 패권을 두고 두 인물이 자웅을 가리고 있었음.그들 중 한 명은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였고또 다른 한명은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이었음.사실 이 기간엔 국민당이고 공산당이고 전통적 강역을 제외한 이외 영토에는 큰 관심을 가질 수 없었음. 너무나 당연한 것이, 그걸 신경쓰고 있다가는 중국이라는 매우 큰 국가의 패권 전체를 상실할수도 있었기 때문임.그리고 국민당은 최종적으로 중국 대륙의 패권을 포기하고 재기를 노린 채 대만 섬으로 후퇴했고, 중국 공산당은 중국 서부의 일부 국민당 잔당이 남아있었지만 주요 세력이 대만으로 패퇴한 것이 확실해지자건국 준비를 마치고 1949년 10월 1일,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음. 제1차 인도 파키스탄 전쟁이 같은 해 1월 5일에 끝났으니, 약 10개월의 시차를 두고 중국 대륙이 통일된 것임.양안관계에 대한 입장차이를 떠나서, 이는 중국 주변 국가들에게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될 수 밖에 없었음. 왜냐하면 중국이라는 국가가 일부 도서를 제외하고 통일된 상태에서 이제 내부 정리가 끝나는 순간 이 총칼이 바로 자신들을 향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임.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직후, 중공은 대만에게서 진먼다오를 빼앗기 위해 진먼다오에 전면적인 상륙을 감행하였고1950년 10월, 625전쟁으로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린 사이 중국은 소리소문없이 티베트를 침공, 해가 지나가기 전 무력으로 점령하였으며티베트 침공 직후 중공군을 한반도로 파견, 멸망하기 전 북한을 지원해 전세를 다시 한반도 중부로 옮기는 등 중국 대륙 외부에 군사력 투사를 아끼지 않고,이후 1958년엔 진먼 포격전을 감행하며 대만해협을 냉전의 최전선임을 각인시키는 등 신생 국가치고도 인근 지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서슴지 않았음.심지어 1960년엔 버마 국경에서 국민당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버마 정부와 손잡고 버마 국경 일부 지역을 장악하고 버티고 있던 국민당 잔당 소탕작전을 진행하는 등 결코 적지 않은 대외 군사작전을 적극적으로 벌임.그리고…중국과 인도 사이에는 명확히 국경을 합의보지 못한 아크사이친이라는 지역이 있었음.이 지역은 명백히 존재하는 지역이지만 19세기 중후반부턴 시크교도 제후가 이끄는 잠무-카슈미르 왕국의 일원으로서, 또한 영국령 인도 제국의 하위 지역으로서 영국은 존슨 선, 매카트니-맥도널드 선 등 해당 구역의 분계선을 임의로 그어놓은 상태였음.이는 크게 보면 영국과 티베트 사이의 국경을 정리해놓은 맥마흔 선의 일부였는데, 맥마흔 선까지 다루면 내용이 길어지니 나중에 정리할 일이 있으면 정리하도록 하겠음.아무튼 이 지역이 임의로 선이 그어진 이유는 해당 국경에 대한 청-영국간 명백한 국경 합의가 없었기 때문인데, 이를 이유로 영국령 인도 제국과 청나라 간 국경 합의를 위해 영국은 여러 번 청나라에 국경 확정을 요구했음그러나 청나라가 해당 요구를 받았을 때는 사실상 청나라가 국가 기능을 하지 못하는 말기암 환자 수준인 상태였던 관계로, 국내외 산적한 문제에 뒤덮여 청나라는 변경 오지 국경선에 신경을 쓰지 못했음. 영국 또한 제대로 된 응답을 받지 못하자 자국이 임의로 그어놓은 경계선을 국경선으로 사실상 간주하고 관리하기 시작했음.그리고 이 문제는 1911년 청나라가 멸망하고 군벌 시기,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까지 중국 내 문제가 계속되면서 어떤 세력도 제대로 된 마무리를 짓지 못한 채 잊혀지게 되었음.그럼 아까 왜 뜬금없는 중국 얘기를 하면서 빌드업을 짰는지 대충 견적이 나올텐데제대로 정해지지 않은 국경, 그리고 그 국경을 사이에 둔 국가가 어느정도 내부 정리를 완료한 시점이 도래했다는 것임.그리고 이런 상황이 맞물리면서 양국간엔 해당 지역을 두고 분쟁이 점화된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또한 전편에서 봤겠지만, 인도는 합병을 약속하고 지원을 요청한 잠무-카슈미르 왕국에게 군사지원을 하면서 해당 지역을 장악했다고 간주했기 때문에, 아무도 살지 않는 이 척박한 지역은 인도 입장에선 “당연하게” 우리 땅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음.1956년, 아무도 살지 않는 아크사이친에 중국 정부 인원들이 도로를 건설하기 시작했음.이건 사실 인도 입장에선 사실상 뒤통수나 다름이 없었는데, 당시 인도 총리였던 자와할랄 네루는 1950년대 초에 이미 “맥마흔 라인을 기반으로 한 국경선”을 국경선으로 인정하겠다는 주장을 했음에도 중국인 이에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임.개인적으로는 당시 중국은 한반도와 대만에 더 큰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황무지 국경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함.문제는 맥마흔 선이 그어졌을 당시, 영국과 티베트 당국은 해당 국경선에 조인을 했으나 중화민국은 어정쩡한 태도로 반대하며 해당 국경선에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건 언제든 중국 대륙을 통일한 국가가(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니더라도) 이 문제에 태클을 걸 수 있었기 때문임.아무튼 중국이 1956년 ~ 57년 건설한 간선도로는 현재 219번 국도(국도219)라고 불리는 중국 서부 국경라인을 따라 건설된 대규모 도로 프로젝트의 일부로서 건설된 도로망이었음. 다만 당시에는 해당 지역에 상주 인구가 없었던 관계로 도로 건설이 끝난 1958년이 되어서야 인도 측에서 해당 도로가 지어지고 개통된 것을 파악하고 이에 대해 반발했음.중국 측에서는 “아크사이친 일대, 즉 맥마흔 라인은 중국이 인정한 적이 없다.”는 주장을 고수하며 물러서지 않았고, 국가 간행물 등에서 해당 지역을 중국 영토로 표기하여 발간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음.1959년부터는 기껏해야 외교적 분쟁이던 아크사이친의 분쟁이 본격적인 양국간의 무력 충돌로 비화되는데,먼저 첫번째로 인도가 티베트 봉기가 실패한 이후 달라이라마의 정치적 망명을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다람살라에 티베트 망명정부를 꾸릴 수 있게 지원을 해서 중국의 격분을 샀기 때문임.결국 이 문제는 크게 보면 티베트 문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티베트 문제에서 달라이 라마는 중국의 아킬레스건과도 같은 존재였었음.게다가 같은 해에 아크사이친을 정찰하던 인도군이 중국군과 교전을 벌여 1명이 포로로 잡히는 사건도 발생함.다만 전쟁 이전까지 양국이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맥마흔 선을 두고 양국간의 입장 차이는 결코 좁혀지지 않았기에 결국 성과 없는 말다툼만 계속 할 뿐이었음.그 와중에도 산발적인 교전은 지속되고 있었는데…(계속)- dc official App- 카슈미르 분쟁의 새로운 도전자 - 2 [시리즈] 카슈미르 · 카슈미르 문제의 근본에 대하여… · 카슈미르 분쟁의 새로운 도전자 - 1 전쟁 직전까지도 중국 당국은 의외로 무력 개입엔 어느정도 찬성하는 분위기였지만 그래도 국지전 이상의 전쟁 자체는 갈팡질팡하며 간을 보고 있던 시기였는데몇가지 외부 요인들로 인해 중국에게 전쟁을 선택하기 좋은 상황이 발생하였음.첫 번째는 인도가 1961년 포르투갈령 고아를 무력으로 장악해버린 사건인데, 이 일 전후로 인도가 영토 문제에 대한 무력 사용을 공공연하게 내비친것에 대한 위기감,두 번째는 중소결렬로 파탄난 중소관계 이후 소련은 인도와 밀월관계를 강화시켰는데, 이번 전쟁을 승리로 끝내게 되면 인도-소련 관계에 대해 흠집을 낼 수 있다는 것,세 번째는 대만의 국민당은 당분간 실질적인 대중국 군사행동이 없을거라는 첩보였음.즉 중국의 추는 점점 국지전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라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고, 이는 점점 확실해져가고 있었음.D.K. 팔릿 준장 - 나중에 군사 저술가로 유명해짐그러나 반대로 인도의 정치권과 인도군은 소규모 무력 분쟁은 발생하더라도 국지전이 일어날거란 예측은 굉장히 낮게 보고 있었는데가장 대표적인 발언이 62년 8월 인도군 팔릿 준장의 “근시일 내 중국과의 분쟁은 없을 것(배제해도 된다.)이다.” 라는 주장이었음. 혹자는 이것이 네루의 성향 탓으로도 파악하기도 하던데 그건 모르겠다만 확실한건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인도가 매우 오판하고 있었다는 사실일 것임.1962년 10월 6일, 침공 14일 전당시 국방부장 린뱌오는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에 인도군의 군사작전이 임박했고, 실행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는 정보를 보고함. 린뱌오의 정보는 매우 정확했는데, 실제로 10월 10일 인도군은 병력 50명을 돝원해 레그혼 작전을 개시하였지만 미리 정보를 알고 대기하고 있던 1,000여명의 중국군에 의해 인도군이 격퇴된 것임.이 보고와 함께 중앙군사위원회는 결국 인도군에 대한 대규모 군사행동을 결의했고, 이제 이 군사행동이 어떻게 이어질지는 단지 시간 문제에 달렸을 뿐이었음.62년 10월 16일, 침공 4일전류보청 원수가 작성한 전쟁계획이 중앙군사위원회 최종승인을 받았고, 10월 18일에는 중앙정치국에서 전쟁에 대한 최종 승인이 내려졌음.타임 라인을 보면 알겠지만 중국은 꽤 마지막까지도 전쟁에 대해 고심했던 것으로 여겨짐. 이를 통해 인도가 왜 오판했는지도 어느정도 이해가 감다만 이때도 중국은 군사행동을 장기간 끌지 않고, 빠르게 인도군을 타격하여 인도가 주장하는 인도 영내로 진격한 뒤 일방적인 휴전 선언을 통해 전쟁을 종식시킬 것을 최종 목표로 삼았음. 애초에 전쟁이 장기화되는 것은 중국에게 절대 유리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애초에 철저히 계산된 제한전을 수행하기로 이미 결정이 되어있던 것임.이러한 제한전 계산은 결과적으로 적중하기도 했지만, 당연할 수 밖에 없었던것이 중국은 인도와 분쟁이 있던 아크사이친과 아루나찰프라데시주는 양국 영토에서 굉장히 작은 부분만 차지했던데다가, 실제적인 분쟁의 원인은 중국의 219번 국도의 건설이었기 때문임.1962년 10월 20일, D-day인민해방군은 류보청 원수의 계획대로 동부의 NEFA(아루나찰프라데시주 일대)와 서부의 아크사이친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음.의도적으로 본문에선 아루나찰프라데시 일대의 분쟁은 조명하지 않았는데, 실제로 충돌은 대부분 서부의 아크사이친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동부의 NEFA 구역은 일종의 양동작전의 형태로 이루어진 작전이었기 때문임.동부의 NEFA 일대에서 진공을 시작한 인민해방군은 3개 연대로, 초기 목표는 인도 주장 국경 바로 아래에 있던 남카추(Namka chu) 강의 남쪽 강안을 장악하는 것을 초기 목표로 지정했음. 남카추 강 남쪽 강안에는 여러 인도군 전초기지를 포함해서, 강을 건널 수 있는 여러 다리가 있었기 때문에 4일간의 전투로 남카추 남쪽 강안은 중국군에게 빠르게 접수당했음.동부에 비해 본 전역이라고 할 수 있는 서부의 아크사이친은 중국에 의해 빠르게 접수당했는데, 아크사이친 일대는 이미 인민해방군에 의해 접수당한 상황으로10월 22일까지 아크사이친 북부의 칩 채프(chip chap) 강, 중부의 갈완(galwan) 강, 남쪽의 판공(pangong) 호까지의 인도 전초기지들이 분쟁 지역에서 축출당했음.저우언라이는 10월 24일 아루나찰프라데시 일대와 아크사이친 일대의 목표 지역을 장악하자 현재 선에서 휴전하며, 원래 목표였던 아크사이친을 제외한 동부 지역에선 중국군을 철군하겠다는 서한을 네루에게 직접 발송하였음이 시기 양국군은 암묵적으로 잠시 휴전하였음.그러나 네루는 11월 14일, 공식적으로 저우언라이의 서한을 거부, 양국은 또 다시 교전상태에 돌입함.뇌피셜로는 이 기간동안 네루 입장에서는 시간을 벌었고 반격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던 것 같음. 왜냐하면 실제로 델리와 아크사이친 사이에는 거리도 가깝고 간선도로망도 잘 되어있었기 때문임.오히려 불리한 것은 중앙에서 먼 중국군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끌릴수록 중국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네루도 간파하지 않았나 싶음.또한 인도 입장에선 예측하지 못한 상태에서 병력과 장비를 증강하지 않았기에 초기 후퇴는 어쩔 수 없는 입장이라고 판단했을수도 있음.결국 중국이 기획했던 초단기전은 인도의 반발로 수포로 돌아가자 중국군은 후속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했음.조공인 동부전선에선 중국군이 세라(se la) 고지, 봄딜라(bomdila), 탐왕(tamwang) 일대를 장악하고 인도군의 도로망을 차단하였는데 이는 부탄 일대로 후퇴한 인도군을 차단하기 위한 차단선을 구성하기 위함이었음.주공인 아크사이친 일대에서 중국군은 중국이 1960년 주장했던 국경선 안쪽에서 인도군을 몰아내기 위한 작전을 시작하였는데, 11월 19일에는 중국이 주장하던 국경선까지 중국군이 도달하였음. 중국군은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음.이 일대 전투에서는 대규모 화력전보다는 군인들이 자연과 사투를 하는 것이 더 큰 문제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인구밀도가 0에 수렴하는 고산지대에서 인도군의 얼어붙은 시신이 굉장히 많이발견되었기 때문임.중국군이 아크사이친에서 중국 주장 국경선에 도달하자 지체없이 11월 21일엔 저우언라이가 일방적인 휴전을 발표하고, 인도는 별다른 응답 없이 군사행동을 대부분 중단하면서 1달 간의 짧은 제한전은 중국의 판정승으로 끝나게 되었음…그리고…중국군이 아크사이친에서 인도군을 쳐바르고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언했다는 소식을 들은 파키스탄은 카슈미르를 먹을 수 있을거란 계산이 서게 되는데…- dc official App
작성자 : 어린이회원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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