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8월8일 해병대 장교들이 새벽 에 공군 비행학교(현 제 5 공중기동비행 단 및 김해국제공항)를 기습했다가 반격 을 당해서 오히려 해병대가 역관광 당했 던 사건.
언듯 보면 공군vs해병대의 자존심을 건 한판대결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은 대한민국 국군 역사상 희대의 병림픽 이자, 해병대가 새벽에 자고 있는 무방비 상태의 공군에게 비겁한 기습을 하고도 오히려 반격을 받고 쳐발리는 굴욕을 당 한 해병대의 창피한 흑역사 이다.
술취한 해병대 장교 8명이 공군 장교 3 명을 집단폭행했다가 그 상황을 알고 달 려온 공군 장교 16명에게 해병 장교들이 얻어 터지고 돌아오자, 이에 보복하려고 해병대 장교 128명이 집단으로 근무지 를 이탈하여 공군 비행학교를 새벽에 기 습하였다.
여기까지만 쳐도 집단 근무지 이탈에 아 군 기지를 습격한 대사건이다. 더 가관인 건, 삼군 중 가장 신사적이고 부드럽다는 공군의 비전투병인 비행학교 장병 300 명이 반격하자, 명색이 전투부대라는 해 병대 장교들이 얻어 터지고 뿔뿔이 흩어 져 오합지졸처럼 무질서하게 우왕좌왕 도망치는 와중에 익사하는 해병장교까 지 생긴 것.
사건의 발단
사건의 발단은 사소한 시비에서 시작되 었다.
66년 8월 7일 오후 7시 20분 쯤에 부 산 발 진해 행 마지막 버스인 경남 영228 호가 비행학교 후문입구 근처인 덕두 정 유소에 정차했을 때, 그 차에 타고 있던 술취한 해병대 장교 8명이 뒷문으로 승 차하려던 공군장교 3명을 타지 못하게 방해했던 것이다. 이 해병대 장교들은 해 병대 장교로 임관된 뒤 해병학교 35기 기초군사반 과정에서 교육을 받던 중 1 박2일 외박을 나와 있던 해병대 소위들 이었다.
이에 다시 공군장교들은 앞문으로 타서 차안에 들어 왔으나, 해병대는 차안에서 시비를 걸었고, 공군장교들이 이들을 묵 묵부답으로 상대하지 않자 발끈한 해병 대 장교들은 한 공군장교의 작업모를 빼 앗아 서로 던지며 희롱했다. 이에 참지 못한 공군장교가 해병대 장교의 몸을 밀 쳐 자신의 작업모를 되찾으면서 몸싸움 이 벌어졌고, 이어 숫적으로 열세였던 공 군장교들은 집단 폭행당한 후 차밖으로 팽개쳐졌다.
7일 저녁
사건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이것을 본 허도창 공군 상병이 비행학교 에 알렸고, 분개한 조종학생 정성규 소위 등 16명의 장교들이 동교 309호 트럭을 타고 앞서간 전기버스를 추격했다. 결국 이들은 웅천에서 8명의 해병장교를 붙 잡아 집단구타하고 되돌아 왔다.
8일 새벽 해병대의 습격
그리고 사건은 말도 안되게 커지기 시작 했다.
공군장교들에게 폭행당한 해병장교들 은 해병학교에 돌아가자 곧 이 사실을 동 료 해병들에게 알렸다. 이번엔 해병장교 들이 분개하여, 치밀한 사전 계획을 세우 고 8일 새벽 128명의 해병장교가 각기 통근열차편으로 진영역에 집결, 민간인 트럭과 버스에 분승하여 김해 공군비행 학교의 입구인 평강(平康) 부락에 도착 했다.
128명의 해병장교는 전원이 차에서 내 리자마자 논밭을 포복하고 이동하여, 마 치 잠복전투훈련을 하는 식으로 정문을 기습했다. 보초근무를 서고 있던 공군헌 병 김용만 병장을 납치하여 권총을 빼앗 고, 조종학생 방을 안내하라고 위협했다. 이쯤 되면 간첩으로 몰려 사살 당해도 할 말이 없다. 군법에 의거 초병의 지시에 불응하는 것은 초병이 발포하여 사살해 도 아무런 책임이 없을 정도의 중죄다. 더군다나 이것은 불이행 정도가 아니라 아예 초병을 납치하고 무기를 탈취한 것 이다. 그것도 민간인이 아니라 누구보다 군율에 철저해야 할장교들이. 월남전 직 전만 아니었다면 사형당해도 할 말이 없 었을 것이다.
새벽 5시 50분 쯤에 김 병장의 안내로 약 1km 거리인 조종학생 내무반에 도착했 고, 128명의 해병장교는 4개 내무반에 분산침입, 돌과 주먹으로 새벽에 잠들어 있던 조종학생들을 난타했다. 갑작스러 운 기습으로 잠이 깬 조종학생들이 내무 반 밖으로 도망치자 돌을 던지며 추격했 다.
이 같은 난투극이 한창일 때 해병대 일부 병력은 주번 사령실에 침입하고, 근무사 병을 추방하거나 감금한 다음 주번사령 최성만 중령(작전과장)에게 학교장과 전 날 사고자를 불러 공개사과토록 강요했 다.
8일 아침 공군의 반격
그러나 비행학교 측은 이에 응하지 않고, 아침 6시 20분 비상소집을 걸었다. 비행 학교 전장병 약 3백여명이 연병장에 집 결해있는 해병장교 128명에게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해병장교들은 연병장에 집결하기 전에, 자고 있던 조종학생 10여명을 폭행하여 이미 무력화 시켰고, 3개소 내무반의 유 리창 31장 등의 기물을 마구 부쉈었다.
쌍방 4백명이 얽힌 패싸움은 10분간 계 속되었다. 그러다가 전세가 불리해져서 공군장병들에게 밀리다가 쫓기게 된 해 병장교들은 공군장병들에게 "더 추격해 오면 비행기를 부숴버린다."고 위협하 고, 실제로 돌을 마구 던져 TS28A형 항공 기 TA858호 좌측날개 전면 3개소, 우측 프랙 1개소와 날개 끝을 깨뜨리는가 하 면, TA 886호의 하우링 좌측 전면 1개소 및 프로펠러의 베어링 등을 부쉈다. 즉 해병대 자신들이 공군장병들에게 좀 덜 맞으려고, 국가의 재산이자 소중한 국방 전력인 (더구나 몹시 가난했던 당시 1960년대엔 더더욱 귀중했던) 항공자산 을 고의로 파손시킨 것이다. 명색이 해병 대 장교란 자들이 자기를 헌신해서 국가 의 중요재산을 지키려 하긴 커녕, 오히 려 중요한 국방 자산을 담보로 자기들의 안전을 꾀하려 한 셈.
8일 아침 해병대의 도주
아침 7시 쯤, 철조망 밖으로 나간 해병장 교들은 제각기 흩어져 달아났다. 이 가운 데 이의일 해병소위가 철조망 밖 늪에 빠 져, 전우들에게 구조되었으나 이미 사망 한 상태였다
피해
이 사건으로 2대의 비행기가 파손되었 고, 도합 39명의 중상자가 나왔으며, 1명 의 사망자(이의일 해병소위)가 나왔다.
이의일 소위는 66년 경희대를 졸업하고 해병대 간부후보생으로 입대하였으며, 홀어머니 우경학 씨의 아들 3형제중 막 내라고 한다. 부검결과 익사로 판정되었 다.
결말
장지량 공군참모총장과 강 해병대사령 관이 현지에 달려갔고, 국방부에서는 합 동수사반을 구성하여 현지조사에 나서 게 하였으며, 해병 20명과 공군 14명을 연행하여 조사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많이 잊혀지고 해병대 출신의 회 고글 혹은 해병대의 각종 야사 썰들을 모 아 놓은 해병대 출신들의 블로그 등에서 나 언급되는 정도이지만, 사건이 발생한 당시에는 주요 일간지에 관련 기사가 도 배가 될 정도로 엄청나게 큰 파문을 일으 킨 사건이었다.
정부와 군 상층부에선 처음에 관련자 전 원을 군사재판에 회부한다고도 했으나, 당시에는 월남전 상황이라 장교들은 필 요한데 관련자가 너무 많아서인지 주동 자들만 군사 재판에 회부하고 사건을 넘 기고 말았다.
여담이지만 해병대 측의 주동자였던 전 도봉 소위와 당시 공군 비행학교 당직사 관이었던 이양호 대위는 30년 후 각각 해병대 사령관과 국방장관으로 해후(?) 하게 되며, 공교롭게도 둘 다 임기를 채 못마치고 재직 중 비리 및 뇌물수수 혐의 로 구속된다(...). 근데 여러 해병 출신들 이 전도봉 사령관은 뇌물혐의 무죄판결 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여기저기에 우겨 대서 정말 무죄판결을 받은줄 아는 사람 들이 많지만 이것 역시 구라다
왜곡
건 자체만으로만 보아도 일단 명백하게 해병대 소속 여러 장교들이 군법적으로 심각한 범죄 행위를 저지른 것이며, 알랑 한 \'자존심\'의 논리로 보아도 해병대가 자고 있던 공군 대원들에게 비겁한 기습 을 했음에도 결국 공군에게 처발린, 해병 대로서는 참으로 치욕적인 흑역사 수준 의 사건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황당한 사실은 21세기인 지금에 와서도 어처구 니 없게도 이 사건을 정반대로 왜곡시켜 서 마치
해병대가 이긴 무용담인 것처럼 조작한 여 러 버전의 구라소설들이 예비역 해병들의 블로그 등을 통해서 퍼져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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