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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역사 ] 러시아의 햄릿, 파벨 1세의 암살사건을 알아보자
[시리즈] [역사역사?] · [역사역사] 조선시대에 있던 페미니즘(?) 기록을 알아보자 · [역사역사] 고양이를 활용한 펠루시움 전투를 알아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PY5LQQlvWLE표토르 3세와 예카테리나 2세의 외동아들로 태어나 러시아 제국의 9대 황제였던 파벨 1세. 그는 복잡했던 가족사와 개인의 우유부단한 성격, 나아가 종국에는 매우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는 점에서 러시아의 햄릿으로 불리기도 함. 우선, 7대 황제이자 그의 아버지였던 표토르 3세는 황제로 재임한 지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쿠데타를 진압하지 못하여 그대로 폐위당했음. (이 과정에서 아내였던 예카테리나 2세가 적극적으로 반란군을 활용했다는 얘기도 있는데, 정확한 고증은 X)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상 독극물에 의한) 복통 및 출혈로 급사당함. 아무튼 그 다음 황제로 즉위했던 예카테리나 2세는 사실상 자신의 친아들이었던 파벨 1세에게 큰 관심을 안 줌. 애초에 파벨 1세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관심도 못 받고, 6대 황제이자 (표토르 3세의 이모, 예카테리나 2세의 시엄마) 였던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손에 자라왔음. 애초에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도 자기 조카인 표토르 3세가 황제로서는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떡잎부터 교육하고자 파벨 1세를 양육했던 것. 실제로 친모인 예카테리나 2세는 자기 아들을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 정도 보는 데 족했다고 함. 아무튼 그 와중에 자기를 실질적으로 키워준 옐리자베타도 죽고, (사실상 엄마에 의해) 아빠도 죽으며 정상적인 어린 시절을 못 보냈지만, 그래도 어차피 다음 황제는 내꺼노 ㅋㅋ 기대로 자랐었을 것임. 그러나, 생각보다 예카테리나 2세가 매우 장수하며 무려 그로부터 34년을 더 황제를 하다가 죽음으로써 (심지어 60대까지 남색도 심했다고 함..) 파벨 1세는 41세라는 나이가 되어서야 황제에 즉위함. 아무튼 파벨 1세는 대관식을 통해 황제에 취임하자마자 어머니이자 전임 황제, 예카테리나 2세의 정치 방향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일을 수행했음. 사실 예카테리나 2세는 즉위 직후 지지 기반이 없었기에 쩔 수 없이 당시 귀족들 기득권 강화해주는 정책을 썼는데, 이후 파벨 1세는 철저히 귀족중심이 아닌 중앙집권형 통치체제로 문화를 바꾸려 하였음. 귀족의 세금·근무 부담을 부활시키고, 여행금지령과 외국 서적 반입금지령 등을 시행함. 결국, 파벨 집권 초부터 귀족층과 군부는 황제의 변덕스러운 성격과 강압적 방식에 반감을 가짐. 뿐만 아니라, 도대체 뭐에 꽂혔는지는 모르겠지만 매우 엄격한 상명하복 및 제식 절차와 엄격한 복장 착용, 심지어 열병식 등을 중시하는 프로이센식 군대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군 문화 자체도 보다 엄격하게 바꾸었을뿐만 아니라, 매일 오전 11시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일일 병사들 사열을 감독 및 관리까지 했다고 함. 참고로 예카테리나 2세처럼 사치욕이 심하진 않았으나, 으레 왕들이 그러하듯 건축물 축조 욕심이 심해서 무리하게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미하일롭스키 성을 무려 4년 만에 인력 갈아넣어서 짓게함. 심지어 이 성을 얼마나 사랑했냐면 아직 지어지기도 전, 즉 공사 중인 와중에도 최소한의 경비만 데리고 살았을 지경이라고. 아무튼 이런 국내 귀족층, 군부층의 반발과 동시에 사실 국제정치적 측면에서도 파벨 1세의 무능이 있었음. 파벨 통치 초기부터 유럽 동맹체제의 변화가 있었고, 이를 둘러싼 외교 갈등이 국내 정치에 영향을 미쳤음. 예컨대, 러시아와 영국·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 전쟁을 중점으로 엇갈린 외교를 펼치면서 신경전이 고조되었음. 그 전까지 러시아와 영국은 나름 우호적 관계였음에도, 상당히 영국을 적대하고, 오히려 친프 정책을 펼침. 당연히 궁정 내 반대파들은 파벨이 연이어 대영 제국 선박을 몰수하고, 영국 선원을 투옥하는 등 전쟁 직전의 적대적 조처를 잇달아 취하자 매우 분노했다고 함. 실제로 1800년 말에는 영국 함대가 발틱해에 출동할 정도로 양국 관계가 극단으로 치달았음. 특히, 1800년에는 영국이 시칠리아 섬 남쪽의 몰타섬을 정복하였는데, 당시 주권적 집단권 행사한 몰타 기사단의 수장이었던 파벨 1세은 사실상 엄청난 극대노를 행했다고 함. 아무튼 그 이후 대놓고 친프랑스 외교 무브를 밟으며, 러시아군과 프랑스군이 70,000명 규모의 합동 인도 원정을 계획했는데, 파벨은 인도 침공을 위한 코사크 부대를 조직하여 3월에 출정시킬 준비까지 실제로 하였다고 함. 결국, 이런 국내/국외적으로 심각한 하자가 있었고, 무엇보다 귀족층의 반발이 압도적으로 강했던 터라 파벨 1세는 항상 암살과 역모에 대한 의심증이 강했음. 결국, 아까 지어진 미하일롭스키 성에서 자기 가족들까지 전~부 내쫓고 호위무사들만 배치함. 물론, 이렇게 자신의 황제 가족들을 내쫓은 것이 추후 있을 암살 사건에 사실상 결정적 영향을 주는데... 1801년, 마침 호위무사 대장이 출타했으며, 의심병으로 가족들까지 내쫓긴 그 날 밤. 상트페테르부르크 군사령관 P. A. 팔렌 백작과 레오 폰 베니그젠 장군이 선두에 서서 침실을 급습함. 아무튼 파벨 1세는 당시 연회에 참여 중이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당시 파벨 1세의 아들이었던 황태자 알렉산드르도 같이 있었음. 연회가 끝나고, 파벨 1세 혼자 있었을 침실로 반란군들이 들어갔는데 촛불만 켜진 채 아무도 없던 것임. 그러나, 반란군에 참여했던 한 장교가 "황제의 부재를 보고, 사라진 줄 알았으나 침대 위의 천을 만져보니 아직 따뜻했다"고 말하며 결국 커튼 뒤에 숨어있는 황제를 찾음. 이후, 반란군들은 옛 표토르 3세 때 하던 것처럼 알아서 그만 두시고, 아들(알렉산드르)한테 넘기라고 말했음. 실제 황제에게 퇴위를 강요할 문서를 이미 준비해 두었으나, 와중에 파벨 1세도 당연히 거절했고 반란군 수장 중 하나였던 팔렌 백작도 말하기를 "오믈렛을 만들려면 달걀은 깨야만 한다." 라며 알렉산드르를 황제로 만들려면(오믈렛) 퇴임이 아니라 확실히 파벨 1세가 죽어야(달걀 깨기) 한다고 주장한 것임. 결국, 몸싸움 끝에 반란군들은 파벨 1세의 머리를 담뱃재로 쳐서 쓰러트린 후 목졸라 죽였다고 함. 이 당시 이 반란군의 배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영국 지원설임. 실제로 영국에서 지원금을 받았다는 추측도 있고, 무엇보다 공모에 참여한 귀족 가운데 한 명인 프린스 P.A. 주보프는 영국식 헌법을 모델로 한 개헌안을 준비한 것으로 알려져 있음. 참고로 아들이었던 알렉산드르도 어느정도는 파벨의 퇴임에 대해서 보고 받았다고 함. (대충 아버지 폐위 후 내가 왕이되겠구나 정도) 그러나, 당연히 이렇게 처참히 죽을 줄은 몰랐기 때문에 자신 아버지의 시신을 보고 의식을 잃었을뿐만 아니라, 3일 내내 울며 황제 자리를 거부했었다고도 함. 아무튼 이후 즉위한 알렉산드르의 경우에는 추후 자신의 아버지 반란에 가담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렇다할 처벌 없이 그냥 일부 면직 재가만 한 채 통치를 수행하기도 했었고, 아버지가 없앴었던 할머니, 예카테리나 2세의 정책들을 다시 복원하기도 함. 그도 그럴 것이 인간적 감정에서는 아버지로서의 원망과 비애가 동시에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자신 즉위 위해 도움을 준 반란군들과 완전히 대비되는 행동을 또 하기도 아이러니한 것. 실제로 대관식에서도 파벨 1세(아버지)가 아닌 예카테리나 2세(할머니)의 치세를 이어가겠다고 함. 아무튼 러시아의 리버스 사도세자, 햄릿이라고 불리는 파벨 1세는 그 특유의 고질적인 의심병과 반귀족정책이 상당히 문제가 있었지만, 톨스토이 소설에서도 언급되듯 농노제를 (의도가 뭐든) 개혁적으로 건드려 본 자체가 유의미했다는 평가 역시 존재함. 아무튼 이 파벨 1세 가족들의 초상화 그림처럼 겉으로 보면 누구보다 호화스럽고, 행복한 모습이지만 속으로는 서로 다른 권력 욕구와 음모, 이합집산이 담긴, 시사점이 많은 교훈이 이 이야기를 통해 남겼다고 생각함.. - dc official App
작성자 : 영단어봇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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